봉오동 독립군은 무술실력이 뛰어난 정예 군인이었다.

100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에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만들고 정예 독립군을 양성한 최운산 장군 일가의 준비와 헌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간도 제일의 재벌이 자신의 전 재산을 무장투쟁에 바치며 일구어 낸 역사에 여러 놀라운 내용이 있지만 오늘은 무림고수 최운산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북간도 봉오동에 터를 잡고 수십 년 무장투쟁을 이어간 그의 삶에서 어린 시절에 배우고 익힌 전통무술이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1800년대 말, 당시 간도는 조선의 영토였고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당시 행정의 중심지였던 연길에 살면서 연변지역 조선인들의 안위를 책임졌던 연변 도태 최우삼은 漢族들을 연변으로 이주시키는 청나라의 간도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최우삼은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밝히며 무력으로 맞섰다. 무력충돌을 하면 군사력이 우위에 있는 청나라를 이기기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조선의 영토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최우삼은 안타깝게도 이 국경분쟁에서 패했다.

이 전쟁 당시 도태 최우삼의 목숨을 구해준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그는 당대의 무림고수로 검술과 봉술의 대가였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무술인은 이후 최우삼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아들들의 무술 사부가 되었다. 무술인의 길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과 청년 수십 명이 함께 무술 수련을 시작했으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점점 인원이 줄어들었다. 몸을 잘 쓰는 최우삼의 아들들이 비교적 오래 남아 제대로 무술을 익혔다. 마지막까지 수련을 멈추지 않아 스승으로부터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선언을 받아낸 사람은 둘째 명길(운산) 하나뿐이었다.

100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에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만들고 자ㅂㅣ 2021년 7월 5일에 열린  최운산 장군 순국76주기 추모식에서 무술시범 공연을 하는 김용민 사범
100년 전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에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만들고 자ㅂㅣ 2021년 7월 5일에 열린  최운산 장군 순국76주기 추모식에서 무술시범 공연을 하는 김용민 사범

이 최고의 무술실력이 대한민국 무장독립투쟁의 기반이 되었다. 중국인보다 중국말을 잘 했던 명길(雲山, 萬益, )은 무술 실력을 인정받아 당시 중국 동북삼성 보위단에 들어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간부가 되었다. 한편으로 운산은 왕청현 총대로 일하며 중국의 새로운 토지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황무지였던 봉오동을 비롯한 양수천저, 서대파, 십리평을 비롯한 왕청현 일대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운산은 그 중에서 아늑하고 넓은 들판을 산이 둘러싼 곳, 맑은 강이 흘러  농사짓기에 좋은 땅에 터를 잡고 鳳梧洞이라 이름 지었다조모 청주 한씨와 부친 최우삼을 비롯한 일가 4대가 함께 이주하였다. 이 봉오동으로 최씨 일가와 친척들을 시작으로 가까운 함경북도의 동포들이 모여들었다. 새로운 마을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나이가 어린 막내 명철을 제외한 명록, 명길, 명철 3형제는 동삼성 보위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전투력과 지략을 갖춘 최씨 삼형제를 喜(명록, 진동), 豊(명길, 운산), 興(명순, 치흥)이라 불렀다. 청나라가 쇠하고 군벌들이 성장하면서 군벌 간의 치열한 세력 다툼과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였다. 뛰어난 무술실력과 사격술을 갖춘 최운산이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장작림과 최운산 형제들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

당시 만주에서는 마적들이 횡행할 때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재산을 지켜야 했다. 최운산 장군도 개인적으로 필요한 무장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큰 꿈을 꾸었던 최운산은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을 겪는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중국 동삼성 보위단에서 군대 조직과 운영을 경험한 최운산은 마적으로부터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봉오동에서 무장 사병부대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최운산의 요청에 보위단 책임자는 부대에 있는 조선인 병사들을 사병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파격적인 조처와 함께 그의 사직을 허락했다. 부대를 운영할 경제력과 무술 실력을 겸비한 군사지도력뿐 아니라 조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과 결심이 굳건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몇 명의 중국인 병사도 중국군에 남아있기보다 인품이 좋아 풍요로울 으로 불리는 최운산 장군의 휘하를 선택했다.

1912년 최운산은 중국군에서 데려온 전투경험이 풍부한 100여 명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봉오동사관학교를 창설했다. 본격적인 무장독립군 양성이 시작된 것이다.  오래지 않아 북간도 봉오동에 가면 독립군이 될 수 있다는 소문이 국내에도 전해졌다.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분노하던 의기에 찬 젊은이들이 속속 봉오동으로 모여들었다. 몇 년이 지나자 봉오동의 독립군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중국군에서 군사훈련을 책임졌던 최운산 장군은 독립군을 지원하는 청년들에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을 오르내리는 체력훈련을 시키고, 무술연마를 통해 집중력을 기르게 했다. 50대의 나이에도 봉을 들면, 여러 명의 젊은이가 협공을 해도 원 밖으로 밀어내지 못했다는 뛰어난 최운산 장군의 무술 실력은 봉오동 독립군 훈련의 근간이 되었다.

    2021년 7월 5일 최운산 장군 순국76주기 추모식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는 무술인 김용민 사범. 
    2021년 7월 5일 최운산 장군 순국76주기 추모식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는 무술인 김용민 사범. 

그리고 러시아에서 소총과 기관총, 대포 등 신형무기를 구입해 사격술을 가르쳤다. 최운산 장군은 독립군이 되길 원하는 애국청년들을 모두 받아들여  정예 독립군으로 양성했다애국심과 열정으로 독립군이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먹고 자고 일하면서 공부와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공간, 그곳이 봉오동이었다.

최운산 장군이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면 크고 우렁찬 구령소리가 봉오동의 산을 울리고 돌아내려 마을에 있는 가족들의 귀에도 들렸다고 한다. 군대를 운영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없다. 군사를 모아 체력을 단련하고, 군자금을 마련해 무장을 갖추고, 무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사격 훈련을 쉬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정신무장을 위해 시대적 당위성과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 할 수 없다. 어느 나라나 모든 군대는 언제일지 모르는 단 한 차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실전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목숨을 건 전투현장에서 당황하지 않고 제대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봉오동의 독립전쟁의 승리는 매복전이 주효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잘 훈련된 군인이 아니면 목숨을 건 전투에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매복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한다. 봉오동의 독립군은 무술실력이 뛰어난,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고 매복전을 펼칠 수 있었던 실력 있는 독립군이었다.

봉오동·청산리의 독립전쟁에서 기관총과 대포로 완전 무장한 일본 정규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우리 독립군은 전투 경험도 없는 농부 출신들로 구성된 게릴라가 아니라 봉오동에서 10년 이상 훈련 양성된 정예 독립군이었다. 최운산 장군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해 북간도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이 <대한군무도독부>가 중심이 되어 북간도 여러 독립군 단체가 통합하여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가 구성되었다.  이들이 봉오동과 청산리독립전쟁 승리의 주역이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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