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의해 외면당한 역사적 진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뉴스를 보면서 정말 생각이 많았던 올해 광복절이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유해 봉환 소식과 함께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약칭 극동민족대회)를 기록한 영상이다. 극동피압박민족대화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대회에 우리나라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여운형, 김규식을 비롯한 정치가들과 최진동, 최운산 형제와 홍범도 등 독립군 단체 대표들도 참석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극동민족대회)' 모습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극동민족대회)' 모습

1921년 11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아시아와 관련이 있는 9개국이 모여 동아시아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워싱턴회의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멈추기 위한 의제 등 서로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러시아도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식민지 문제가 이 회의에서 의제화되기를 원했던 임시정부는 이승만과 서재필 등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 대표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워싱턴회의에서도 대한민국 대표단은 회의장 참석조차 못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야 했다.

그러던 차에 동아시아의 중요국이면서 워싱턴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던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다음해인 1922년 1월 워싱턴회의에 대응하는 국제회의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개최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었던 이 대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 50여 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했다. 좌우 이념을 떠나 먼 이국땅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논의하고 힘을 모았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단의 수석 대표였던 김규식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완전 무장한 일본 정규군대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전했던 우리의 독립전쟁에 대해 설명했다. "빨치산이 서부 간도 지방에서 소대로 나뉘어 무장을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북부 간도 지구 민중은 장래의 대규모 전쟁을 위한 준비에 집중적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전부 2개 사단의 완전히 무장된 강력한 일본군에 직면하여 적어도 10회에서 9회까지 적을 철저하게 패주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모스크바는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고 있으나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것은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자본주의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고자 기대하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과거 워싱턴은 민주주의와 번영의 중심지로, 모스크바는 짜르의 전제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표상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이제 상황이 역전되고 있음을 비교하며 우리의 독립의지를 강조했다.

이 대회 기간 동안 주최국인 러시아가 대회 모습을 스케치했던 동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대회에서 발언하는 각 국 대표단의 모습과 이동하는 모습 등이 들어있는데 2018년 한 역사학자가 러시아 영상물보관소에서 이 영상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생전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 감격스러운 자료다. 그 영상이 깨끗하게 복원되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소식에 맞춰 공개되었다.

그 중 '홍범도 당군의 생전모습'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공개한 것이 있다. 극동민족대회의 대회장인 레닌이 봉오동과 청산리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과 연대장 홍범도 두 분에게 권총과 군복을 선물했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을 쵤영한 부분이다. 사진을 위해 러시아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권총이 잘 보이도록 권총집을 가슴 앞으로 보이게 연출한 모습이다. 레닌은 이 기념사진을 두 분에게 선물했다.

 극동민족대회 대회장인 레닌이 최진동 홍범도 두 분에게 권총과 군복을 선물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극동민족대회 대회장인 레닌이 최진동 홍범도 두 분에게 권총과 군복을 선물하고 기념촬영했다. 이 사진도 선물했다

만주 도문시에 있던 최진동 장군의 집 안방에 이 사진이 오래 걸려있었다고 한다. 지금 하와이에 살고 있는 최진동 장군의 딸 경주는 아버지가 1941년에, 어머니가 1944년에 돌아가신 뒤 1945년 겨울 외조부모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당고모는 사진 액자가 너무 커 그 사진을 이사짐에 포함하지 못하고 집에 두고 온 것을 평생 후회하며 가슴 아파했다. 2018년 겨울 이 사진을 전해 받은 86세(현재 89세)의 딸은 73년만에 아버지의 사진을 확인하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여러 매체에서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이라는 영상을 뉴스로 내보내면서 홍범동 장군과 함께 서서 대화하고 있는 최진동 장군은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그 자리에 함께 서서 대화하는지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궁금한데 아무런 설명이 없이 지나갔다. 간혹 옆에 있는 사람이 최진동 장군이라고 자막을 넣은 방송사도 있지만 설명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모 방송사는 최진동 장군 사진에 김규식이라는 자막을 붙이기도 했다. 우리 언론이 이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치명적인 실수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의 조선 강점에 대해 외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적 도움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국들의 이해관계에 밀려 파리강화회의도, 워싱턴회의도 참석조차 못했던 상황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강조하기 바빴던 오늘 대한민국 언론은 당시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좌우 이념을 떠나 왜 그렇게 대규모의 대표단을 보냈는지, 레닌과 대한민국 대표단의 관계는 어땠는지, 레닌이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50명이 넘는 한국 대표단 중 왜 최진동 홍범도 두 분에게만 선물을 했는지 설명할 시간도 없다. 몽양 여운형 선생과 최운산 장군이 함께 차에 앉아 이동 준비를 하는 장면도 누군지도 모르게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1~2초에 불과한 그 부분마저 편집으로 삭제했다.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여운형 선생과 최운산 장군이 차에 앉아 대화 중에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가장 큰 왜곡은 보도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권과 편집권으로 외면하고 제외해서 마치 없던 일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 언론의 힘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소식을 전하는 2021년의 대한민국 언론은 1922년 1월에 있었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비틀었다. 나의 이러한 문제 제기에  한 기자가  보도자료에 없는 내용이라 기자가 미처 확인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 큰 문제다. 평소 기자들이 보도자료만 인용하는 기사를 쓴다는 뜻이다. 왜 더 공부하고 한 발 더 나가는 질문을 하지 않는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궁금해 하는데 왜 시청자를 대변하는 언론이 왜 궁금해 하지 않는가!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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