쵤영 후 기념사진 , 역사학자 한홍구, 은주, 윤주,성주 3남매,  최불암  
쵤영 후 기념사진 , 역사학자 한홍구, 은주, 윤주,성주 3남매,  최불암  

 

한 이십여 년 만에 순대를 만들어 보았다. 이제 나이가 들어 고기를 절제하고 있지만 어릴 때 먹었던 북간도 음식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의 맛이다. 만두나 순대는 둘 다 공동체성을 잘 드러내는 음식이다. 혼자 먹으려고 하는 음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먹기 위해 만드는 음식,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양이 많아 혼자 만들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음식,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야 하는 음식이란 점에서 공동체 문화를 잘 보여주는 음식인 것 같다.

특히 순대는 소와 돼지를 잡을 때 내장과 피를 잘 활용하기 위해 생긴 음식이었지만 순대가 완성되면 고기 자체로 만든 음식보다 훨씬 풍미가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요리로 재탄생한다. 봉오동에서 우리 독립군들이 함께 이룬 공동체의 가치도 그랬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력과 재능, 헌신이 모여 생각지 못했던 결실을 맺고 거대한 산을 이루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형제들이 모여 팔을 걷어붙이고 순대를 만들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봉오동에서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함께 이루었던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다시 돌아보며 뭉클해지기도 했다. 특히 한끼에 3000명을 먹이셨다는 할머니 김성녀 여사의 헌신이 어땠을지 몸으로 체험하면서 어떻게 독립군들 사이에서, 집안에서, 당신의 위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셨을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모든 것을 당신 주장대로 끌고 가신 것이 아니라 항상 부인 김성녀 여사와 함께 의논하셨다. 봉오동 독립군기지는 그렇게 운영되었던 공간,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났던 공간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음식 만드는 과정 전부를 제대로 카메라에 담아야 하니 재로 하나를 넣을 때마다 매번 잠깐 기다려야 했고, 실수하면 다시 시작해야 해야 했다. 아파트 부엌이 좁아 촬영팀이 고생했다. 더군다나 평소 음식을 잘 만들지도 않는 내가 중심이 되어 작업을 하려니 실수가 연발이었다. 부족한 솜씨 탓을 카메라로 돌리며 겨우겨우 마무리를 했다. 사진으로 순간을 남긴다는 생각도 못하고 막 지나버려 사진이 몇 컷 없다.  

 

촬영을 다 마친 후에야 형제들과 들러앉아 순대를 맛보고 있다. 순대와 천엽냉채, 북간도식 짠지 등이다.
촬영을 다 마친 후에야 형제들과 들러앉아 순대를 맛보고 있다. 순대와 천엽냉채, 북간도식 짠지 등이다.

 

촬영을 위해 음식을 하나씩 순서대로 완성해야 했다. 먼저 만두를 빚고 가지된장찌개, 천엽냉채를 만들었다. 마지막에야 고난이도 작업이 기다리는 순대 만들기에 돌입했다. 쉽지 않은 대장정이었다. 순대를 만들 때는 아이들이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피를 손에 묻히고 해야 하는 일이라 곁에서 거치적거리지 않는 게 최선이다.  우리 형제들도 어릴 때는 눈치껏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순대가 완성되면 용감하게 덤벼들곤 했다. 카메라 눈치를 보면서 일하다 보니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음식을 만드는 날과 진행자 최불암씨와 대화하면서 음식을 나누는 날 사이에 며칠의 간격이 있었다. 음식 만드는 날은 너무 피곤해서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며칠 동안 만두와 순대를 냉동실에 넣었다가 다시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냉동실에 넣어둔 탓인지 처음 만들어 먹을 때의 맛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 더구나 잠시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음식을 먹기로 해서 대화 중에 부엌에 들락거리느라 조리시간 조절에 실패했다순대를 자르는 장면을 찍다가 최불암 씨가 옆에서 하나 집어서 맛보았는데 아뿔싸! 덜 익은 것이었다.

 북간도에서는 돼지고기와 가지를 둠북 넣은 된장찌개 를 즐겨 먹었다.
북간도에서는 돼지고기와 가지를 둠북 넣은 된장찌개 를 즐겨 먹었다.

 

불에 올려놓은 가지된장찌개는 대기 시간이 길어 졸아버렸다. 옆에서 삶고 있던 만두도 건질 타이밍을 놓쳐 터지고 있었다. 겨우 몇 개 건져 밥상을 차렸다. 조밥과 된장찌개, 만두와 순대, 천엽냉채를 상에 올렸다. 정신없이 허둥거리느라 준비한 음식을 다 꺼내 놓지도 못했다. 겨우 한술 뜨던 최불암 씨가 만두를 하나 집었는데  만두가 터져서 속이 접시로 툭! 떨어져 버렸다.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웠지만 웃으며 넘겨야 했다. 봉오동 독립군 이야기는 한홍구 교수님이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지만 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겨우 묻는 말에 몇 마디 답하면서 촬영을 마무리했다.

사실 우리 집 만두와 순대에 대한 나의 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어머니 솜씨가 물려받지 못해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늘 죄송하고 안타까웠다.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망했다!

그래도 정말 기쁘다.

한국의 밥상이 시공을 초월해 100년 전 만주 봉오동에 다녀온 것 같다.

방송에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

 

* 한국인의 밥상  KBS1TV, 8월 12일 저녁 7시 40분 방송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양성숙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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