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통에 후방에서 탱자탱자 대통령 될 궁리만 했던 박정희

박정희 비자금 우리통장에 있어요(5)

625 전쟁통에 후방에서 탱자탱자 대통령 될 궁리만 했던 박정희

나는  20218, 실미도 사건 50주년을 맞아 <실미도로 떠난 7인의 옥천 청년들(모시는 사람들)>을 출간했다. 옥천으로 귀촌한 지 10. 우연히 31명의 훈련병 중 7명이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예사로 넘길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실미도 난동범들은 모두 흉악범, 무기수 출신이라고 묘사되었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국민에 대한 국가폭력은 너무나 심각했고 국가는 오랜 세월 국민을 속여 왔다.

반세기가 되었는데 더 늦기 전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어야 할 것 같아 사망자의 가족,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사료들을 뒤적이며 부랴부랴 책을 썼다. 사망한 7인의 옥천 청년들은 영화에서와 달리 18, 19, 20세의 옥천 삼양초등학교 동창생들이었다, 7인의 집은 5~10분 거리에 있었고 그들 중 누구에게도 전과는 없었다. 자료를 뒤져가며 그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박정희야말로 한반도의 역사를 비틀어놓은 귀태(鬼胎), 역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실미도 부대는 19681. 21일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 직후 보복을 위해 급조된 부대였다. 국가는 엄청난 사탕발림으로 청년 31명을 뽑았다. 훈련병들은 스스로를 국방부에 소속된 특수군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부는 애초부터 그들을 군인이 아닌 민간인 소모품으로 여겼다. 그들을 살인병기로 훈련시킨 뒤 이용(사용)하고 사망해도 모르쇠로 일관할 계획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는 1·21 사태 이후 전 국민을 북한규탄 분위기로 몰고 갔지만 실은 남쪽의 방첩부대 이진삼 대위가 석 달 전 북으로 잠입해 35명의 인민군을 사살한 것이 그 빌미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비밀에 부쳤다. 작전을 수행한 이진삼 대위에게 두툼한 봉투를 하사한 것이 불과 석 달 전 일이었는데 말이다북을 혐오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최고 권력을 계속 움켜쥐려는 박정희에게 필수적인 일이었다.

사진1) 실미도부대  공작원31명 중 4명(5명?)은 1971년 8월 버스에서 교전 끝에 살아남았으나 정부는 1973년 3월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비공개군사재판 뒤 사형시켰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부는 재판과정에서 입을 다물도록 그들을 끊임없이 회유하였고 상고심을 포기하게 했다. 국가는 아직 유족들에게 시신(김병염, 임성빈, 이서천, 김창구)을 매장한 곳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사진1) 실미도부대  공작원31명 중 4명(5명?)은 1971년 8월 버스에서 교전 끝에 살아남았으나 정부는 1973년 3월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비공개군사재판 뒤 사형시켰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부는 재판과정에서 입을 다물도록 그들을 끊임없이 회유하였고 상고심을 포기하게 했다. 국가는 아직 유족들에게 시신(김병염, 임성빈, 이서천, 김창구)을 매장한 곳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사진 2) 1968년 4월 실미도 부대 창설의 원인은 1968년 1월 김신조 부대 청와대습격시도사건이었고 그 사건의 원인은 1967년 9~10월 이진삼의 3차에 걸친 북한 잠입 인민군 35인 사살이었다.  (2011년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털어놓은 이진삼은  1990년 육군참모총장, 1991년 체육청소년부 장관, 2008년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사진 2) 1968년 4월 실미도 부대 창설의 원인은 1968년 1월 김신조 부대 청와대습격시도사건이었고 그 사건의 원인은 1967년 9~10월 이진삼의 3차에 걸친 북한 잠입 인민군 35인 사살이었다.  (2011년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털어놓은 이진삼은  1990년 육군참모총장, 1991년 체육청소년부 장관, 2008년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가 최고 권력을 갈망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 학생 때 그의 눈에는 교사가 최고 권력자였기에 교사가 되었고, 교사가 된 이후에는 긴 칼 찬 군인이 최고 권력자였기에 개와 말의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의 군인이 되어 독립군을 잡으러 다녔다. 해방된 후에는 좌익세력이 우세하니 군 조직 내 좌파가 되었고 미군정과 이승만이 득세하여 좌파를 척결하니 좌파를 배신하고 여순사건에서 살아남았다. 그 여파로 1949년 면직이 되었지만 1950년에 전쟁이 터지자 바로 소령으로 복귀했다. 면직된 동안 그는 주먹을 쥐고 야무진 계획을 세웠던지 소령으로 복귀하자마자 부산 인근에서 돈 많은 물주 물색에 나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관리하고 있던 강 대위를 앞세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식당을 하던 한희승을 소개받았다. 한희승은 박정희의 그물에 걸린 첫 번째 먹잇감이 되었다.

-한희승은 누구인가?

한희승은 1905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193.1 독립 만세가 전국에서 터져 나왔을 때 그는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경찰 짚차에서 탈출, 바로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11년 만에 토목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다. 금광과 토목회사를 운영하며 천석꾼의 딸 백금남과 결혼, 문이 104개가 있는 집을 지니고 살았다. 해방되자 재산을 일부 챙겨 처와 5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사업을 했지만 전쟁이 터지자 바로 최남단 거제도로 와서 포로 상대로 식당을 하던,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

625 발발 후 소령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9월에 중령으로 진급되었고 12월에 부산으로 피난 온 육영수와 재혼했다. 한희승, 백금남 부부가 오래도록 박정희를 박 소령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아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은 전쟁 초기인 19509월 이전, 한희승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식당을 하고 있을 때로 보인다. 박정희는 한희승이 북에 엄청난 재산을 두고 왔으며 남으로 와서도 야무지게 돈을 버는 것을 보고 그를 표적으로 삼아 공을 들였다.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후방에서 물주 한희승, 물주를 소개한 강 대위, 대구사범 동창 서정귀 등과 수시로 고급술집을 찾아다니며 탱자탱자 술판을 벌였다.

사진 3) 박정희 중령은 전쟁 중인 1950년 11월 아내 김호남과 이혼하고 12월에 육영수와 재혼했다.
사진 3) 박정희 중령은 전쟁 중인 1950년 11월 아내 김호남과 이혼하고 12월에 육영수와 재혼했다.

한희승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장사를 그만두고 부산 금정구 금사동의 공병대, 총포재생창, 타이어재생창, 양정 경비대대에서 식당(PX)을 했다.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고기, 초콜릿, 쿠키, 캐러멜, 커피 등이 들어있는 깡통 통조림)이 한국군에게도 지급이 되었는데 박정희는 전량을 한희승에게 몰아주어 국제시장에 팔 수 있도록 해 주었다.(이익을 보게 해주고 다시 그 돈을 상납받는 것은 후일 재벌중심의 경제시스템 구축을 통해 그대로 반복되었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면 박정희는 김정구의 두만강, 고복수의 짝사랑 등을 불렀는데 자리를 파할 때면 박정희는 어김없이 12살 위인 한희승을 선생님이라 칭하며 신발을 닦아 신기 좋게 가지런히 한희승의 발아래 놓아주었다. 술자리가 거듭되면서 박정희 옆자리의 서정귀는 회사 사장이 되겠다고 장래 희망 사항을 말했고 (실제로 서정귀는 1967년 호남정유 사장이 되었으며 1968년 동서식품을 창업했다. 이후락과는 사돈이며 이 책의 핵심인물인 서정화의 6촌 형이다. 이후락은 서정화와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박정희는 자기가 앞으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말을 수시로 꺼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면 한희승이 북에 남기고 온 재산을 되찾아주겠다면서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한희승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한희승은 박정희의 패기와 깍듯한 예의범절에 매료되었다. 1953년 한희승 부부는 광목 치마로 보따리를 만들어 현금을 채워 박정희에게 건넸다. 1954년에도 한 보따리, 1955년에도 한 보따리. 3년을 건네주었는데 한희승은 점차 박정희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박정희가 친일행각을 벌였으며 잔인한 짓거리들도 서슴없이 행했다는 등의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한희승은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진 4) 1954년 포병 사령관 시절의 박정희 준장. 대통령이 되겠다며 한희승으로부터 돈을 받아내던 시절이다.
사진 4) 1954년 포병 사령관 시절의 박정희 준장. 대통령이 되겠다며 한희승으로부터 돈을 받아내던 시절이다.

19564, 백동기 중사의 결혼식에서 만난 박정희와 한희승은 크게 언성을 높이며 다투었다. 한희승은 박정희의 옳지 않은 행적들에 대해 비판했고 박정희는 자기는 군부대 지휘관이니 한희승도 자기 말에 따라야 한다고 명령조로 윽박질렀다. 한희승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 민한 간나새끼. 음흉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 배신도 쉽게 할 놈이지.” 박 소령은 대통령감도 아니며 믿음직스럽지 않고 돈을 꾸어준 것이 참으로 후회된다며 방으로 들어갔던 한희승은 예닐곱 시간이 지난 뒤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로 가족에게 발견되었다. 일곱 번째 자녀인 한영순의 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한희승의 아내 백금남은 운영하던 PX들을 모두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박정희에게 꾸어준 돈을 받아내려 애를 썼다. 백금남이 박정희에게 연락하면 박정희는 득달같이 지프차를 보내어 모셔갔다. 그리고는 찔끔찔끔 소액의 돈 봉투를 내밀었다. 과연 그는 몇 년 뒤인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1963년에는 기어코 대통령이 되었다.

사진 5)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 옆에 차지철이 보인다. 둘은 똑같이 NPD(자기애성 인격장애)를 지니고 있다.
사진 5)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 옆에 차지철이 보인다. 둘은 똑같이 NPD(자기애성 인격장애)를 지니고 있다.

 

사진 6)저자 한영순의 어머니 백금남. 박정희에게 돈을 받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돌아온 것은...
사진 6)저자 한영순의 어머니 백금남. 박정희에게 돈을 받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돌아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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