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을 털어가고 한 푼도 돌려줄 계획이 없었던 박정희

박정희비자금 우리 통장에 있어요(6)

-3년을 털어가고 한 푼도 돌려줄 계획이 없었던 박정희

625 전쟁통에 부산에서 탱자탱자 술판을 벌이며 대통령이 되면 북의 재산을 찾아주겠다는 말로 북에서 월남한 자산가 한희승에게 접근했던 박정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 상대로 재생창, 타이어식당을 하던 한희승에게 박정희는 부산 금사동에 있는 공병대, 총포재생창, 타이어재생창, 양정경비대대 등지에서 민간인 식당(PX) 을 할 수 있도록 알선했다. 당시 미군의 전투비상식량(씨레이션)이 일부 한국군에도 지급 되었는데 박정희는 한희승이 그것을 독점적으로 구입하여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박정희는 술집을 전전하며 마음껏 술과 노래를 즐기며(고복수의 짝사랑과 김정구의 두만강이 박정희의 단골노래였다고 한다) 물주인 한희승과 친분을 두텁게 쌓았다. 12살 연상이던 한희승을 깍듯하게 선생님이라 호칭하며 구두를 닦아 댓돌 위에 놓아 주던 야망가 박정희의 요구를 한희승은 거절하지 못했다. (권력을 이용해 상대에게 돈을 벌게 해 주고 다시 그에게서 이익을 갈취하는 방식은 박정희가 전쟁통에서부터 터득한 자금 마련 방식이었다. 이것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독점하려 했던 박정희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만들어 간 이유다. 한국 경제의 특징적 요소가 된 재벌1972년부터 영어 chaebol 이라는 표기로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지 10년이 되던 무렵이다.

(사진1) 재벌은 개인이나 가족에 의해 경영되고 통제되는 한국의 큰 산업 대기업을 뜻한다... 이 용어는 1972년에 영어 텍스트에 처음 등장했다.(엔사이클로피디아, 위키피디아)
(사진1) 재벌은 개인이나 가족에 의해 경영되고 통제되는 한국의 큰 산업 대기업을 뜻한다... 이 용어는 1972년에 영어 텍스트에 처음 등장했다.(엔사이클로피디아, 위키피디아)

광목치마를 꿰매어 만든 자루에 돈을 담아 3년을 건네주었던 한희승이 1956년 박정희와 언쟁 끝에 사망하자 그의 아내 백금남이 박정희에게 가끔 기별을 하면 즉각 짚차를 보내 만나주었지만 봉투에 넣어 주는 건 이자라고 할 수도 없는 돈이었다. 몇 년 뒤 과연 박정희는 쿠데타를 성공시키더니 한 달 뒤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1963년 대통령이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의 권력유지와 확대를 위해 굴러가도록 만든 조직이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사망한 채권자 한희승의 아내 백금남 주변뿐 아니라 7남매의 주변도 맴돌았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이자 경리부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이후락은 채권자 백금남의 입을 막을 요량으로 채권자의 자녀 7남매 중 3녀인 20대 초반의 한춘자를 점찍었다. 고생하는 엄마 곁에서 살림을 맡았던 그녀는 허영심 많고 불만이 많아 친구가 일하는 대구의 다방으로 쪼로록 도망가기 일쑤였다. 이후락은 청와대 안에서 음식을 만들던 김종찬을 다방으로 보내 한춘자를 구워 삶았다. 그녀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돈을 넣었지만 관리는 김종찬의 몫이었다.

-박정희가 돈은 갚았다는데 구경도 하지 못한 한희승의 아내 백금남

이후락은 채권자의 아내 백금남을 찾아와 앞으로 채권 채무관계는 자기가 담당할 것이며 자식중 하나에게 돈을 넣을 것이지만 누구인지, 얼마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려고 하지 말 것이며 가족 간에도, 그 밖의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과 명령을 어기면 모두 죽게 될 것이라며 협박을 했다. 돈을 갚았다고 통장을 흔들어 보여주었지만 그 뿐, 백금남은 그 통장을 만져보지도, 돈을 인출해보지도 못한 채로 시간만 흘렀다. 둘째 딸이 그 통장을 갖고 있는지, 셋째 딸이 그 돈을 만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1968년 백금남은 지역구 의원인 김영삼을 찾아가 하소연 했다. 그러나 백금남에게 찾아온 결과는 구속이었다. 계 모임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계원이 돈을 입금하지 못하자 다른 계원이 득달같이 계주인 백금남을 고소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충분히 수습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형을 살고 나온 백금남은 무전유죄를 뇌이며 눈물로 지내야 했다. 박정희는 통장에 돈을 넣어 빚을 갚았다는 모양만 갖추고 실제로는 자기부하를 시켜 요리를 했으니 애당초 빚을 갚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무섭고 교활한 탐욕 아닌가.

채권자인 한희승의 아내 백금남이 무기력해지는 동안 이후락이 보낸 부하 김종찬은 한춘자와 내연의 관계를 맺으며 그녀의 인감으로 통장의 돈을 마음껏 요리했는데 이후락은 김종찬을 꽤 신임했던 모양으로 김종찬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에게 그 통장을 넘길 때까지 15년을 관리했다. 전두환이 이후락과 김종필 등을 부정축재자라며 족치고 있을 때 김종찬은 곧바로 30조가 넘게 들어있는 한춘자의 통장을 전두환 정부에 넘겨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춘자는 김종찬과 함께 있을 때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자매들에게 회고하고는 했는데 김종찬은 그녀에게 보랏빛 꿈을 꾸게 해 주었던 모양이었다. 김종찬과 부동산중개업을 할 때 하나회 장성들이 한춘자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조아렸으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그들이 부지런히 사들인 부동산들을 뻥튀기 500% 감정평가 받아 상업차관을 들여오기도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18년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비자금을 갈취했는데 일본에서 한일협정시 받은 정치자금, 월남참전용사 전투수당, 강남 개발 공지 이전 토지 대규모 구입, 재벌에게 집중 혜택을 주고 상납금 받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모았고 그 액수는 천문학적일 것이며 한춘자 이외의 차명계좌도 많이 만들었으리라고 본다. (1993년 김영삼의 금융실명제 이후 5년이 지난 1998100조가 넘은 통장을 가진 9명을 포함 834명의 차명계좌 명단이 드러났다는 것은 앞서 3편에서도 밝힌 바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서정화(앞에 나왔던 서종귀와 6. 이 책의 핵심인물)는 비자금의 실체에 대해 샅샅이 파악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서정화는 앞에서 말한 바대로 이후락과 사돈 간이며, 한화 김승연의 장인이며, 2005년부터 DK그룹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산 2조를 가진 서수민 서홍민 회장의 부친이다.

사진 2) 서정화-40년간 한 정당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서정화는 충남도지사(1974~1976), 내무부 차관(1976~1980), 중앙정보부 1차장(1980), 내무부장관(1980~1982), 민주평통 총장(1983~1985), 국회의원 5선(1985~2004/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상임고문(2003~현재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사진 2) 서정화-40년간 한 정당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서정화는 충남도지사(1974~1976), 내무부 차관(1976~1980), 중앙정보부 1차장(1980), 내무부장관(1980~1982), 민주평통 총장(1983~1985), 국회의원 5선(1985~2004/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상임고문(2003~현재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이제 90세가 된 한 사람이 (이름만 바뀐) 같은 정당에서 국회의원 20, 상임고문 20년 합계 40년간 몸담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진귀한 일이다. 대체 무엇이 서로를 그토록 오래 붙잡게 하는 걸까? 서정화의 신출귀몰한 언행은 한국 현대사의 귀한 연구감이다. 경제학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들은 서정화를 깊이 연구해보아야 한다. 그는 왜 한춘자에게 슬금슬금 다가왔을까? 왜 그렇게 한춘자에게 공을 들였을까? 다음 편에 살펴보기로 한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고은광순 주주  koeunk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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