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박심배 형 1주기 기리는 홍광석씨의 글


1991년 ‘분신’ 박승희 열사의 부친
병원에서 ‘임종’ 지켜보며 첫 인연
2014년 폐암 말기 진단 받은 직후
보상금으로 ‘박승희장학재단’ 설립
지난해 7월 별세 직전 마지막 전화
“혼미한 상태에서 여섯번이나 걸어”

2014년 6월 박승희장학재단 설립 직후 광주에서 만났을 때 함께한 모습이다. 왼쪽부터 박승희 열사의 부친 고 박심배씨와 모친 이양순씨, 필자 홍광석씨. 1991년 전남대 학보사 사진기자로 박 열사의 분신 현장을 기록했던 김태성씨가 찍은 사진이다.
2014년 6월 박승희장학재단 설립 직후 광주에서 만났을 때 함께한 모습이다. 왼쪽부터 박승희 열사의 부친 고 박심배씨와 모친 이양순씨, 필자 홍광석씨. 1991년 전남대 학보사 사진기자로 박 열사의 분신 현장을 기록했던 김태성씨가 찍은 사진이다.

2021년 7월 7일 새벽, 형의 전화에 잠이 깼습니다. 그런데 “형, 접니다.”라는 말이 끝나기 전에 전화는 끊기고…, 다시 벨은 울리고…. 예상치 못한 부름에 놀라 큰딸 정휘와 통화했더니 “아버지는 통화 가능한 상태가 아닌데요”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의식이 혼미해진 형이 무엇 때문에 또 어떻게 내 번호를 찾아 한두 번도 아닌, 여섯 번이나 누른 것인지…. 그러나 며칠 뒤 7월 13일, 형은 저에게 풀기 어려운 의문을 남기고 떠나가셨습니다.

지난 1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생전에 형은 자신의 폐암 치료 때문에 ‘민주화운동 관련자’가 아니라 ‘민주화운동 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앞장섰던 배은심 여사의 투쟁에 동참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셨지요. 그러면서 저를 만난 자리에서 “이 나라 민주화 과정에서 공권력의 폭력에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공권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자신을 내던졌어. 아마 그런 젊은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언론의 자유도 인권도 없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과 희생당한 사람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라고 부르고 있으니…. 유관순 열사를 ‘독립운동 관련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던가?”라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박승희·김철수·윤용하·정상순, 청년 학생이 4명이나 분신 사망했던 1991년 광주 5월, 민주주의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대책회의 대변인으로서 저는 안타까운 청년 학생들의 치료와 임종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배당하고 잡혀가고 나중에는 실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는 증서를 받았습니다만, 배은심 여사의 투쟁을 보면서도 저 역시 암투병 중이라는 핑계로 한발 물러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은심 여사의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비로소 여섯 번이나 저를 불렀던 ‘심배 형’의 당부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뚜렷한 이념과 철학을 가지고 민족과 민주라는 가치를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을 단순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묶어두는 현실은 잘못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국가는 민주주의를 앞당기고자 투쟁했던 젊은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지켜줄 ‘민주화 유공자법’을 제정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요즘 국회와 정부의 태도를 보면 민주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의 정신을 기릴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딸을 보낸 뒤 박승희 열사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청년 학생들의 아버지가 되었던 형, 망월동 민주 묘역에 모신 열사들의 추모제와 여러 단체의 행사 때마다 마음 아픈 이들을 위로하는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이었던 형, 남편 혹은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에게는 함께 울어주는 가족이었던 형을 기억합니다.

고 박심배씨의 둘째딸 박승희 열사는 1991년 4월 29일 전남대 5·18광장에서 열린 명지대 강경대 학생 사망 규탄 집회에서 분신해 5월19일 끝내 숨졌다. 5월25일 고 박승희 열사 민주국민장이 열렸다. 연합뉴스
고 박심배씨의 둘째딸 박승희 열사는 1991년 4월 29일 전남대 5·18광장에서 열린 명지대 강경대 학생 사망 규탄 집회에서 분신해 5월19일 끝내 숨졌다. 5월25일 고 박승희 열사 민주국민장이 열렸다. 연합뉴스

그리고 2014년 폐암 진단을 받은 형은 승희의 민주화운동 보상금에 사비를 보태어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말이 쉽지 장학재단을 누구나 선뜻 만들 수 있는 일이던가요. 그런 형의 모습 그리고 형이 하는 일에 묵묵히 동조했던 형수를 지켜보면서 저도 지난 30년 승희의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형의 당부를 잊지 않고 ‘민주화 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며 또 앞장서는 분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 형도 하늘나라에서 ‘민주화 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싸우는 분들을 지켜보시며 응원해주십시오.

자신이 폐암 말기 환자이면서도, 지난 7년간 네 차례 수술 끝에 좌절하고 절망했던 저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던 형을 아프게 기억하며 다시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광주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목포에서 오가는 길목인 나주 우리 집에 일부러 들러 대문 앞에서 “동생, 나 왔네”라고 전화하며 웃던 형의 모습이 생생하고 그립습니다. 앞으로도 형을 위해 자주 기도하겠습니다.

남평/홍광석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 초대회장·박승희장학재단 초대이사장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 이글은 지난 7월 25일 한겨레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 기사 보기 :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52206.html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경애 편집위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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