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니다] 고 박남업 자혜의원 원장 기리는 막내딸의 글

1968년 11월 30일 서울 종로에서 평양광성고보 16회 동기들과 함께한 기념사진 / 뒷줄 시계방향으로 7번째 반백에 바바리코트 입으신 분이 아버지
1968년 11월 30일 서울 종로에서 평양광성고보 16회 동기들과 함께한 기념사진 / 뒷줄 시계방향으로 7번째 반백에 바바리코트 입으신 분이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어림 200킬로 거리인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 부 박승락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서 사립학교와 평양 광성고보(북은 평양 제일중학교로 남은 서울 마포에 광성고등학교 개명함)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의전(서울대 의과대학 전신)을 졸업하셨다. 동 대학 부속병원에서 조수로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의원을 개업했다. 후에 강서종합병원과 함흥 철도병원에 내과 의사로도 종사하셨다.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남북으로 동토가 갈라졌을 때 평양중앙병원에서 종사하다 이후 교육성(남쪽의 교육부)에서 러시아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교수로 재직했다. 1947년 평양 의과대학(이후 김일성대 의학부로 흡수됨) 내과 교수로 임명됨과 동시에 김일성 주석의 주치의로 내정되었다.

경성의전 재학시절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외교관이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어학 공부에 전념하여 독어와 라틴어, 불어, 러시아를 비롯한 10여개 나라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셨다. 분단 전에는 의사라는 그리고 후에는 복잡한 정세에 의사와 교수라는 전문직업인이었기에 누군가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시기였습니다. 할아버지의 대(의사)를 잇기 위해 의사의 길을 택해야 했지만 해방되면 외교관이 될 것이라는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얘기한다. 북쪽 정권의 최고 권력자 주치의였기에 굳이 남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북에서 대우받으며 안정적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남쪽으로 피난 온 이유가 궁금하다고 말이다.

1950년 12월 할아버지와 어린 동생 넷을 데리고 아버지는 급히 부산으로 피난 가게 되었다. 북에는 처자가 있었다. 부산 부산진구 부전동의 ‘변내과'에서 종사하다 1952년 강원도 춘천 소양호 근처에서 ‘대중의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개원했다. 전쟁이 휴전으로 바뀌고 난 1954년 4월 아버지와 큰삼촌은 육군 특무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강원도 화천에 있는 육군 2군단 군사법원에서 징역 15년과 10년을 선고받아 그해 8월 마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북의 세 자녀에게 금과 현찰 먹거리 등을 제공하기 위해 월북을 기도했다는 혐의셨다. 이는 아버지 재산을 노린 이종사촌과 결탁한 특무대의 공작이라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은 사실심리를 떠나 중형을 선고하고 사건을 마무리하셨다.

아버지에게는 가장 중요한 존재인 처자를 이북에 남기고 내려와야 했지만 함께하지 못한 한은 전쟁과 휴전, 평화에 이르기까지 어느 편도 풀어주지 못했다. 북에 남긴 가족을 남쪽으로 데려오든지 그도 어려우면 물질적으로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귀를 기울였는데 그건 망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분단을 망각했던 중대한 과오라며 자신에게 주어진 형기를 감내해야 했다.

마포형무소(후에 교도소로 개명)와 안양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여러 장기수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옥중 주치의셨다. 특히 신현칠 선생님과는 1989년 타계하실 때까지 그 우정을 함께 나누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15년형이 10년으로 감형되어 1964년 4월 안양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이듬해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대양 의원’을 개원하셨다. 1945년 남북이라는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가 아닌 남과 북이라는 가름이 강제되고 나서는 남쪽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단어가 ‘인민’이었다. 춘천에서는 ‘대중의원’ 상호를 내걸었지만 그게 국군 특무대에선 북을 이롭게 하는 상호가 되었다고 해서 ‘대양 의원’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요즘 개업의들은 자신들의 출신학교를 내세워 상호를 사용하지만 의사는 사람을 떠나 종사할 수 없는 직업이기에 언제나 사람 중심의 넓은 뜻을 담았다.

1971년 내가 4살 때, 저를 안고 있는 아버지와 뒤에는 간호사 언니분들
1971년 내가 4살 때, 저를 안고 있는 아버지와 뒤에는 간호사 언니분들

1966년 어머니를 만나 재혼하셨다. 응암동으로 이주하여 ‘자혜의원’을 개원하셨다. 분단 이전에 평양 의과대학 부속병원 이름이 자혜의원이었다. 1968년 4월 나는 막내딸로 태어났다. 북에 있는 오빠와 언니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출생과 동시에 이산가족의 일원이 되어야만 했다.

함께 옥살이하였던 여러 장기수 선생님들이 출소 후 자혜의원을 찾아오셨다. 돈이 없는 환자가 왔다고 해서 진료를 거절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쉬는 날도 없는 진료를 이어갔다. 제도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분들이라고 해서 냉대하지도 않았지만 사람을 업신여기는 그 어떤 언행이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말을 놓지도 않았다. 그러했기에 의원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문턱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1975년 1월 하순 자혜의원과 의원 앞 응암동 골목길에서
1975년 1월 하순 자혜의원과 의원 앞 응암동 골목길에서

환자나 손님이 없을 땐 북에 두고 온 자녀들에 대한 보고픔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독서와 음악으로 그 힘겨움을 대신하셨다. 내가 성장해가면서 알게 되었으니 뒤늦은 부끄러움에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어머니와 가족 셋이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는 동안 함께하는 외출이나 외식을 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북에 두고 온 자녀들에 대한 죄책감을 당신의 잘못을 탓하며 그걸 잊지 않으려는 채찍이었다는 것을 운명하실 때 알게 되었다.

1975년 8월 어느 날 치안본부 정보과는 반공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연행해가더니 4년이라는 옥살이를 또 하게 만들었다. 환자가 없을 때 들었던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이북 방송을 듣기 위함이었고 진료실에서 지인들에게 북의 방송 내용을 공유시켰다는 혐의를 씌웠다. 재판 내내 치안본부에서 아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공안기관이 주장하는 그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주교도소의 4년간 옥살이는 매우 힘겨우셨던 것 같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한 의사의 몸이 망가지고 제때 치료받지 못해 더 힘들어하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감옥살이하셨던 한겨레신문 김효순 전 논설위원의 표현을 빌자면 갇힌 이들의 주치의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한다.

1979년 8월 출소하시고 나서 1980년 3월 자혜의원을 재개원 했을 때

79년 8월 만기출소를 하고 나서 내려놓아야만 했던 자혜의원 간판을 다시 달았을 땐 너무나도 연약하게만 보였다. 80년 어느 날이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순 선생님 사모님께서 폐결핵 중증으로 가망이 없어 마지막 희망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치료에 전념하였다. 당시 폐결핵으로 사망한 사례는 흔한 경우였지만 김일성대 의학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결핵을 강의하실 정도로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과 서울대 의과대학에 근무하는 동기들에게 부탁하여 신약을 받아 마침내 강순희 여사님께 완치라는 결과를 안겨주었다.

1976년 광주교도소에 함께 옥살이한 전병생(당시 한신대 간첩조작사건으로 구속)목사님이 1987년도 아버님을 찾아왔다. 석사논문(한신대 신학부)을 봐달라고 하셨다. 그때 전병생 목사님이 교회개척을 하러 익산에 내려간다고 하셔서. 그럼 필요한 게 뭐가 있냐고 하시니까 전목사님께서 아직 의자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백만원을 드렸다. 그 돈 가지고 의자 100개를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전목사님 자서전에 아버님과 관련한 내용이 게재된 바 있다
1976년 광주교도소에 함께 옥살이한 전병생(당시 한신대 간첩조작사건으로 구속)목사님이 1987년도 아버님을 찾아왔다. 석사논문(한신대 신학부)을 봐달라고 하셨다. 그때 전병생 목사님이 교회개척을 하러 익산에 내려간다고 하셔서. 그럼 필요한 게 뭐가 있냐고 하시니까 전목사님께서 아직 의자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백만원을 드렸다. 그 돈 가지고 의자 100개를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전목사님 자서전에 아버님과 관련한 내용이 게재된 바 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학림장학재단을 운영하신 할아버지는 분단 이후 북의 토지개혁으로 토지 전부를 당신의 이름에서 지웠지만 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교육성 교수이자 김일성대 의학부 교수로 자기 대를 잇고 있는 아들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아버지 역시 남쪽에서 모진 감옥살이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민족이 처한 현실을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자혜의원을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해 결코 문을 닫지 않겠다는 아버지가 더 이상 진료하기 어렵게 되고는 자신이 다니고 의학을 배웠던 대학병원에서 80년대 말 운명하셨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말고 화장해서 뿌리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 유언을 따르지 않으셨다. 언젠가 통일되면 북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지막 뜻마저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나에게는 아버지처럼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가라는 당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올 때 셋째 윤주가 여섯 살이었는데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가 남쪽으로 내려올 때 무슨 연유로 급박하게 내려와야 했는지를 딸인 저로서도 궁금증을 지우지 못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꺼내지 않으셨다. 내가 그 말을 꺼내면 아버지는 나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모진 인내를 했던 것처럼 그 아픔을 더 후볐을 것이다.

1973년 받은 서울대 의대 동창회원 비
1973년 받은 서울대 의대 동창회원 비

이글은 결코 아버지에 대해 회상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내 곁을 떠난 지 34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마저 오빠나 언니들에게조차 전할 수 없는 비극적인 분단 상황을 우리는 너무 방관했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이 선택하지 않은 남과 북이라는 단어에 우리 사회는 너무 길들지 않았는지를 반문한다. 남북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에 불과하다.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잃었을 때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목적지를 향해 가던 시대가 아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지금이건만 우린 유독 북으로는 갈 수 없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고향은 자동차로 불과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인터넷 여러 웹을 통해서도 지구상 곳곳을 이동하기 위한 거리와 이동 수단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도 목적지를 설정조차 할 수 없는 땅, 전혀 지도에 나타낼 수 없는 북녘땅이 더 이상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단마저 잊게 하는 망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듯이 강철도 녹슬기 마련이다. 녹슬기 전에 제철소로 들어가야 철의 성분으로 거듭나듯이 이정표에 불과한 남북을 철조망으로 가로막고 머리에서조차 지우려는 가름의 남과 북은 이제 그만 걷어 들여야 한다.

걷을 건 걷고 녹일 건 녹여내야만 분단으로 인해 갈라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아버진 숱한 환자를 치료하면서도 편견이나 이유를 달지 않았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부위에 대한 처치와 아프지 않게 전체를 지켜내기 위한 주의를 당부하였을 뿐이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절대 망각하지 않았기에 통일의 그날을 기다리셨다. 외교관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머지않아 반드시 통일은 이뤄질 테니 자신의 꿈마저 망상이라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가라는 유언을 여전히 담고만 있다.

북의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오빠와 언니가 저의 사연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두고 온 자녀들에 대해 절절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독서와 클래식 음악으로 순간순간을 덮으려 했던 그 보고픔을 대신하여 전해드리고 싶다. 동생의 마음이다.

경기도의 한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지만 그곳엔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이 없다. 도로 방향 표지판에서조차 나타내지 못하는 강서군 고향으로도 허용되지 않는 현실이기에 오랜 기간 삶을 나눴던 여러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옆으로 옮겨드리려 한다. 그곳엔 아버지처럼 슬픈 사연을 두고 잠들어 계신 분도 있기에 슬픔을 다독거리며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생한다면 가족이 헤어져야 하는 분단이 아닌 통일시대에 태어나서 전생에 하지 못한 꿈을 실현하여 남북이 존재하지 않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자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당신의 희망과는 달리 평양 의전(평양의과대학)의 출판물이나 옥중에서 함께 생활하였던 선생님들의 회고집을 통해 남겨져 있다. 늦게나마 아버지를 기억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북녘땅의 윤병 윤정 오라버니와 윤주언니께 34만에 아버지 부고를 전하면서 동생 윤경 올림

* 이글의 발췌본은 2022년 10월 17일 <한겨레> 지면에 실렸습니다(인터넷 한겨레 기사는 :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63911.html)

원고료를 드립니다 -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원고료를 드립니다 - <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편집 : 김미경 편집장 

박윤경 주주  pyk196804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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