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정보조사실의 주요 현안을 마무리하고 모처럼 편안한 오전을 보내고 있는 모리 국장이 보고차  들어온 조사 3과장을 맞이했다.

"유럽 여행을 마친 카즈미가 며칠 전에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알아본 결과,  카즈미는 만방제세백교의 미주지역장을 만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특이사항은 없는가?"

"카즈미는 미국 가기 직전에 서울에 있었습니다. 서울에서의 특이 동향은 없었습니다."

"카즈미가 마치 만방제세백교의 홍보 대사라도 되는 양 바쁘게 움직이고 있군."

"카즈미의 미국 동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모리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하면 되었네."

조사3과장이 나가자 모리는 생각에 잠겼다. 동북아재단 보고서로 인해 이시하라와 가까워 졌지만 지나치게 이시하라 주위에 접근하는 건 삼가는 게 좋다. 다만 카즈미에 대해서는 갈수록 흥미가 당긴다. 

동북아재단 보고서를 마무리한 모리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2045년에 있을 결정적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모리로서는 그것이 무척 아쉬웠다.  시니어 심령술사인 순스케로 인해 잠시 마음이 어지럽기도 하였으나 그런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카마르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대외공작팀을 맡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조금도 후회는 없었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가족과 외식을 즐기기로 했다. 한국에 갔던 딸 아카네가 도쿄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궂은 날씨에 비가 내릴지 몰라 우산을 챙긴 모리는 마음을 굳건히 했다. 비록 신과 영의 세계는 잘 모르지만, 인간 세상의 일은 누구 못지않게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자부하며 모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카네는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지난 한 달 보름간 백상훈과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저 막연한 꿈과 기대를 품고 서울에 간 것이다. 동영상으로만 보던 백상훈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류가 전 세계로 불어닥치며 일본에서도 잠시 끊겼던 한류가 다시 거세게 불던 참이다. 아카네는 한류에 휩쓸려 한국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서울 한국문화센터에서 카즈미를 알게 되어 백상훈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카즈미는 백상훈을 만방제세백교의 자문위원으로 추천한 열성 팬이다. 상훈으로서도 카즈미는 고마운 존재이고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여인이다. 그런 카즈미가 상훈에게  아카네를 소개한 것이다.

아카네도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동영상으로 짝사랑한 것일 뿐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카즈미의 소개로 상훈과 딱 한 번 카페에 갔을 뿐 더 이상의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아카네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상훈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다시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는 엉뚱한 데서 시작되었다. 백상훈의 한국문화 강의시간이었다. 수업을 마친 상훈이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아카네가 손을 들었다.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특히 일본에서는 선풍적인 신드롬까지 일으켰는데 그 배경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남한의 여자와 북한군 장교가 사랑을 이루기란 불가능에 가깝지요. 그런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을 이어가는 드라마 속의 장면들이 흥미를 유발하고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아카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그런 불가능한 사랑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아카네의 질문에 상훈이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건 사적인 영역이라 답변하기 곤란합니다만."

"왜요? 내가 일본인이라서 답변이 어렵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고요."

 

마포 서강도서관, ‘한류’ 주제로 연속강좌·문화 프로그램 진행 /   ‘다시, 여기, 지금 K-마포’ 포스터. 마포구청 제공 / 출처 : 한겨레 2022-07-04
마포 서강도서관, ‘한류’ 주제로 연속강좌·문화 프로그램 진행 /   ‘다시, 여기, 지금 K-마포’ 포스터. 마포구청 제공 / 출처 : 한겨레 2022-07-04

 

갑자기 강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상훈으로서는 난감한 입장이었다. 일본인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에 아카네가 억지로 질문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지난번에 카즈미의 소개로 차 한 잔을 한 사이인데 이렇게 수업 시간에 자신을 난처하게 할 줄은 몰랐다. 상훈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며 아카네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네, 그게 아니면 됐습니다."

수업을 종료하며 상훈은 기분이 영 찜찜했다. .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아카네가 다가왔다.

"좀 전에는 죄송했어요.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남과 북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질문이 일본과 한국의 국가 간 갈등을 연상시키는 질문으로 이어진 것은 누가 봐도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아카네가 자신을 난처하게 하려고 악의적으로 그런 질문을 한 건 아닐 것이다.  카즈미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상훈은 생각했다.  그나마 아카네의 사과를 듣고 조금 마음이 풀린 백상훈이 말했다.  

"오해도 풀 겸 해서 차라도  한 잔 할까요?"

"차는 됐고요. 서울의 명소라든가 맛집 좀 안내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까요. 마침 오늘 시간도 여유가 있고 하니 안내해 드리죠."

이왕 화해를 하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 상훈이 아카네를 홍대 입구의 맛집으로 안내했다.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홍대 거리를 걸으면서 아카네는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자신의 엉뚱한 질문으로 상훈이 기분이 상하기는 했겠지만, 그 덕분에 상훈의 안내를 받고 있지 않은가.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맛있게 먹은 후 한식집에 들어갔다. 아카네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사실은 지난번에 카페에서 바쁘다고 일어서시면서 아무 말 없이 가셔서 몹시 서운했어요.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고, 다음에 보자는 말도 없으시고. "

아카네의 말을 들은 상훈이 아차! 싶었다. 바로 그거였구나. 일본인이라서 그러냐는 질문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지난번에 카즈미로부터 아카네를 소개받고 카페에 함께 가기는 했지만 아카네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다시 만나자는 말을 기대할 줄은 몰랐다. 가볍게 차 한잔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미안해요. 아카네의 입장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네요. 대신에 오늘 음식값은 전부 내가 낼 테니 맘껏 드세요."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되는데. 암튼 맛있게 잘 먹을게요."

상훈은 진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가까운 나라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큰마음을 먹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한국에 온 게 아닌가.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고 자신을 통해 한국 문화를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오해도 풀 겸 해서 상훈과 아카네는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여 마셨다. 상훈도 기분이 풀리고 아카네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음식점을 나와 홍대거리를 거닐다 보니 타로점 보는 곳이 눈에 띄었다. 아카네가 재미삼아 들어가 보자고 상훈에게 제안했다. 타로점 주인이 애정운을 점쳐 주었다. 타로 점을 보는 인심 좋게 생긴 50대 여인이 덕담을 해 주었다.

"두 분 다 애정운이 좋으세요.  서로 아주 잘 맞는 찰떡궁합인데요."

그때  불현듯 아카네가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부디 이 남자와 짝을 맺게 해주소서~'. 

타로점집을 나오면서 아카네는 상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앞으로 평생 나의 보디 가드가 되어 주시면 안될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젠가 상훈에게 이런 말을 고백할 날이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아카네로서는 꿈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카네는 속으로 피식하고 웃었다. 그런 꿈같은 일이 설마 일어나랴. 그러던 차에 상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앞으로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보디 가드를 해드리지요."

상훈은 만방제세백교의 자문위원으로 자신을 추천한 카즈미의 얼굴을 봐서라도 아카네를 잘 환대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아카네가 농담으로 제안한 것을 상훈이 기억하고 보디가드가 되어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아카네는 뛸 듯이 기뻤다. 

"정말요? 지난번에는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였는데.  너무 감사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가이드님! 아니 보디가드님! "

그때 상훈이 아카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다가 아카네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눈빛.  어디선가 본 눈빛이다. 누군가를  가슴 깊이 연모하고 추앙할 때 보내는 눈빛이다. 누구일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노르웨이 소녀의 눈빛이다.

 '밝은 빛만 더한다, 그 사랑이 잘 보이라고' /  그림 김비 / 출처 : 한겨레 2022-10-30
 '밝은 빛만 더한다, 그 사랑이 잘 보이라고' /  그림 김비 / 출처 : 한겨레 2022-10-30

 

상훈은 1년 전 오슬로에서 열린 기후위기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세미나에서 상훈은  '기후위기 : 동양 사상에서 답을 찾다'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여 참가자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세미나를 마친 상훈이 일행과 더불어 오슬로 근교를 관람할 때 오슬로 외곽 마을 편의점에서 일하는 10대 소녀를 만났다. 한류에 빠진 케이팝 열성 팬으로 자신을 BTS의 '아미(ARMY)'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 그녀는 유튜브 동양상 강의를 통해  백상훈을 알고 있다고 했다. 상훈은 소녀의 요청으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때 노르웨이 소녀가 바로 그 눈빛으로 상훈을 쳐다보았다. 노르웨이를 떠나서도 그 소녀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인상적인 눈빛이었다. 상훈은 소녀의 이름을 묻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그 소녀는 나중에 한국에 꼭 오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아카네의 눈빛이 노르웨이 소녀의 눈빛과 똑 닮았다. 자신을 추앙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옆에 있다는 것은 행복 그 이상의 짜릿함이 있다. 상훈은 아카네를 만나며 언제까지나 그 짜릿함을 즐기고 싶었고, 아카네는 자신의 눈빛으로 상훈을 감싸 안고 싶어했다.  그 이후로 아카네와 상훈은  급기야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도쿄로 돌아온 아카네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서울에서 카즈미의 소개로 안면을 트게 된 상훈과 데이트를 즐긴 것은 물론이고,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수시로 안부를 전하며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원래는 한 달 예정으로 서울에 갔는데 상훈과의 연애를 즐기느라 보름을 더 연장해서 체류했다.

레스토랑에서 모처럼 가족과 외식을 즐기던 모리가 아카네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한 달 있다가 온다고 해서 허락했더니 보름을 더 있다가 온 게야? 서울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래? 그렇게도 한국이 좋아?"

"그럼요. 아빠도 기회가 되면 엄마랑 서울에 한 번 다녀오세요. "

"네 아빠가 퍽이나 그러겠다~!"

모리의 아내가 아카네를 보며 기대하지도 말라는 듯 말했다. 가족과 외식을 하는 중에 스마트폰에 상훈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떴다. 도쿄에 잘 도착했느냐는 안부 메시지였다.  아카네가 부모 모르게 테이블 밑에서 상훈에게 답장을 보냈다.

" 헤어진 지 몇 시간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보고 싶어요. "

머지 않아 백상훈이 도쿄에 와서 아카네의 부모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부모의 반응이 어떨지, 특히 아버지의 반응이 어떨지 아카네는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과연 하나밖에 없는 딸이 한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아카네는 다 잘 될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모리 국장은 아카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순수케에 의하면 아카네가 한국인과 결혼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혹여라도 한국 남자를 사귀게 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카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카네가 아빠의 시선을 눈치챘다.

"아빠! 왜 저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다. 오랜만에 보니 네 얼굴이 더 예뻐진 것 같아 쳐다보는 거지."

모리 국장은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한국인 남자 친구가 생긴 건 아니겠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그래요. 생겼어요.' 라고 답할까 봐 지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모리 가족이 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쿄에 가을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도쿄 거리를 보며 아카네는 서울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 밤 한강 나루터 카페에서 상훈과 나누었던 뜨거운 키스 장면이 떠올랐다. 달콤하고 열정적인 키스를 마친 상훈이 속삭였다. 

"아카네! 사랑해!"

그날 밤 세상에는 네 개의 별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상훈의 두 눈동자와 아카네의 두 눈동자. 아카네에게는 상훈의 눈동자가 이 세상 그 어느 별보다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상훈도 아카네의 눈동자를 보았다. 천사가 하강하여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듯 했다. 

아카네는 문득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라캉이 말했던가.  자신의 욕망에 정확히 부합되는 이미지를 만난다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상훈과의 인연은 어쩌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연이다. 동영상으로 상훈을 짝사랑하게 된 것은 상훈의 이미지가 아카네가 욕망하고 바라는 이미지에 딱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짝사랑이 서울에서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카즈미가 상훈과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카즈미에게 언젠가 신세를 갚을 날이 올 것이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만난 남자들중에서  상훈과 같은 남자를 만나려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인연이 겹쳐야 할까. 상훈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촉촉해진  아카네는 벅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운이 좋으면 꿈속에서 상훈을 볼지도 모른다는 바램을 간직한 채.

<계속>

 

편집 :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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