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방제세백교가 초순진의 소재를 파악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백상훈은 초순진의 보디가드였으며 한 때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렇게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초순진이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2년 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잠적해버린 것이다.  그때 초순진이 백상훈에게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 이제 나를 잊어 주길 바래요. 그리고 더 이상 나를 찾지 말아요. -

그야말로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초순진을 알고 있던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당황해 했지만 백상훈은 달랐다.  백상훈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정이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순진이 갑작스럽게 잠적한 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백상훈은 생각했다. 

당시에 무슨 애절한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초순진이 한국을 떠나 해외 어딘가로 잠적했다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행적을 감춘 초순진에 대해 여러가지 풍문이 나돌았다. 석양이 아름다운 유럽의 강가 어딘가에 커피향이 고소한 카페 주인이 초순진을 닮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왔고, 미국의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어딘가에 퍼진 역병에 걸려 객사했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도 들려왔다.  

석양과 로스코 / 출처 : 한겨레 2022-08-22
석양과 로스코 / 출처 : 한겨레 2022-08-22

초순진이 종적을 감추면서 한동안 시름에 잠겨 있던 백상훈이 기운을 차릴 즈음에 전 세계적으로 한류 붐이 일었다. 한류로 인한 열풍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백상훈은 서울의 한국문화 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 강의를 맡았다. 백상훈의 강의를 듣는 한류팬들은 동남아와 일본, 중국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백상훈의 동영상 강의는 유투브를 통해  전 세계에 인기리에 전파되었다.

당시 백상훈의 동영상 강의를 시청하던 한류 일본 팬 중에 카즈미가 있었다. 만방제세백교의 열성 신자였던 카즈미는 백상훈을 만방제세백교의 자문위원으로 추천했다. 동영상 강의를 들었던 일본팬들이 앞다퉈 추천서에 연서했다. 모리 국장의 딸 아카네도 백상훈의 한국어와 한국문화 강의를 애청하는 열성팬 중 한 명으로서 카즈미의 추천서에 연서했다. 소정의 서류 심사 후 백상훈은 만방제세백교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년 전 겨울이었다. 

자문위원이 된 후 강의 요청이 쇄도하는 등 여러가지 일로 분주했던 백상훈은 만방제세백교의 조직망을 통해 초순진을 찾아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만방제세백교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그간 두터운 신뢰를 얻은 백상훈은 전 세계적으로 포교 조직망을 갖추고 있는 만방제세백교에 초순진의 소재 파악을 의뢰했다. 2년 동안이나 연락을 끊고 잠적한 초순진에게 더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고 싶었다. 보지 않으면 멀어진다고 했던가. 초순진에 대한 백상훈의 마음이 바로 그러했다. 순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만방제세백교는 백상훈의 요청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도 만방제세백교 미주지역에서  초순진의 행방을 찾아낸 것이다. 

백상훈이 만방제세백교의 자문위원을 맡은지 2년이 지난 초가을의 어느 날,  부친의 허락을 가까스로 얻어 한국을 방문한  아카네가 서울 한국문화센터에서 백상훈의 강의를 듣고 있다.  그 옆에는 백상훈의 강의를 들으러 온 유럽의 팬들과 동남아 팬들도 있었고, 카즈미도 눈에 띄었다. 백상훈은 유럽의 팬들은 물론이고, 카즈미를 비롯한 일본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강의를 들을수록 아카네는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매료되었다. 일본이 고대 한국의 백제로부터 문물을 수입하여 그 이후 문명이 개화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과 한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백상훈을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일본인으로서 개인적으로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카네는 백상훈의 강의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백상훈도 강의를 열심히 경청하는 아카네에게 눈길이 갔다. 아담하고 예쁘장한 모습이 백상훈의 관심을 끌었다.  유튜브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백상훈을 남몰래 흠모하던 아카네는 일본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이제 한국어도 제법 할 줄 알게 되어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아카네는 백상훈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백상훈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무작정 다가갈 수 없어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어느날 한국 문화 강의 시간에 아카네 옆에 세련된 모습을 한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행색과 복장으로 미루어 일본인처럼 보였다.  아카네가 일본어로 물었다.

"혹시 일본인이신가요?"

"그래요.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저는 아카네라고 합니다."

"나는 카즈미라고 해요"

통성명을 한 아카네와 카즈미는 이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며칠 후 강의를 들으며 아카네가 카즈미와 귓속말을 하고 있다. 아카네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백상훈  강사님이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요?"

아카네의 말에 카즈미도 동감하며 아카네를 부추겼다.

"마음에 쏙 드는가 보군요.  머뭇거리지 말고, 한 번 대쉬해봐요.  내가 밀어줄 테니까."

"정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밀어주실 건데요? "

"내가 백상훈과  연줄이 좀 닿거든요. "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포스터. 신씨네 제공 / 출처  : 한겨레 2022-11-09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포스터. 신씨네 제공 / 출처  : 한겨레 2022-11-09

아카네가 카즈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발 소원이에요. 저분과 연결만 시켜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정말이지? 알았어요.  그럼 한번 해보지요."

수업이 끝나자 카즈미가 백상훈에게 다가가자 백상훈이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는 또 언제 들어오셨어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는 군요."

"그건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소개해 줄 아가씨가 있어요."

카즈미의 소개로 아카네가 백상훈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카네의 볼에 홍조가 가득했다. 강의를 통해 백상훈에게 아카네는 이미 낯익은 얼굴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아카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과 맑은 눈동자가 마음에 들었다. 바야흐로 백상훈을 향한 아카네의 짝사랑이 현실 속에서  막 씨앗이 뿌려지려는 찰나였다. 

그때 카즈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고바야시 단주였다. 고바야시로부터 전후 사정을 들은 카즈미는 곧바로 미국 위스콘신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미국 가기 전에 만방제세백교 서울 포교원도 들러야 하고, 이런저런 마무리할 일도 있는 카즈미는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한가하게 두 젊은 남녀 사이를 놓아줄 오작교 역할을 할 여유가 없다. 아카네에게 백상훈을 정식으로 인사시켜주었으니 이쯤에서 빠져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두 분은 차라도 한잔하시던가 해요."

카즈미가 아카네에게 잘 해보라는 듯이 한 쪽 눈을 찡긋 감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카즈미가 사라지자 백상훈과 아카네는 멋적은 듯 말이 없었다. 아카네가 먼저 용기를 냈다.

"커피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알고 있거든요."

"아니요. 커피는 제가 사야죠."

"안 돼요. 그렇게 열강을 해주셨는데 커피는 제가 사야죠."

백상훈이 웃으며 그렇게 하라고 하자 아카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치 온 세상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네의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아카네가 일전에 봐둔 분위기 좋은 카페로 백상훈을 안내했다. 나란히 길을 걸으며 백상훈이 아카네에게 이것 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백상훈의 상냥한 말투와 친절한 매너에 아카네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카페에 앉아 훤칠한 미남형의 멋진 백상훈을 마주 보고 있노라니 아카네의 심장 뛰는 소리가 옆 테이블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질문과 대화가 잠시 이어졌다.  얼마 안 있어 백상훈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반가웠어요.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아카네는 아쉬웠지만, 백상훈과 안면을 트게 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백상훈을 이대로 보내면 앞으로 인연이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백상훈은 카즈미가 소개했기 때문에 카즈미의 얼굴을 봐서 예의상 커피 한잔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상훈의 입에서 다시 보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카네가 그 말을 하기에는 백상훈에게  매달리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앞으로도 백상훈과의 인연을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아카네의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저의 보디 가드가 되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한 달간 서울에 머물 예정이거든요."

이렇게 말한 아카네는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대담한 말을 하게 될 줄은 본인도 미처 몰랐다. 심중에 있던 생각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다.

보디가드를 찾지 못했던 ‘보디가드’ 주인공-휘트니 휴스턴 / 출처 : 한겨레 2017-09-22
보디가드를 찾지 못했던  영화 ‘보디가드’ 주인공-휘트니 휴스턴 / 출처 : 한겨레 2017-09-22

 

아카네의 말을 들은 백상훈이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아카네를 쳐다봤다.  보디 가드? 백상훈은 예전에 누군가의 보디가드를 한 적이 있다. 바로 초순진이다. 보디가드를 하면서 초순진과 가까워졌고, 연인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일이 꼬여서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보디 가드는 초순진과의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아카네가 보디 가드를 해달라고 한다. 뜬금없는 말이고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백상훈으로서는 아카네의 제안에 놀라면서도 아카네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서 갈 데가 있다. 더구나 강사로서 여러 명의 수강생과 어울리는 것은 몰라도 젊은 여성 수강생과 단 둘이 데이트를 하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다.  자칫 안 좋은 소문이 날 수도 있다. 강사가 여자를  밝힌다는 등 온갖 소문이 나면 백상훈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쯤에서 점잖게 마무리하는 것이 여로 모로 좋을 것 같다. 더구나 보디 가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대놓고 거절하기는 미안하지만, 의사표시는 분명하게 하는 게 좋을 듯했다.

"글쎄요. 지금으로선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무튼, 한 달간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랄게요."

백상훈으로서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 했다. 한류로 인해 한국어와 한국 문화 강의를 신청하는 외국인 신청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백상훈에게 호감을 갖는 여성들도 한둘이 아니다. 다가오는 모든 여성의 마음을 다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카즈미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카네와 자리를 가진 것이다. 아카네가 예쁘고 호감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초순진 이후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둔 적은 없다. 아카네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초순진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를 초순진에게 마냥 대책 없이 목을 매고 있을 수는 없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다른 여인을 만날 가능성  정도는 열어두고 있다. 그게 과연 아카네일까. 아카네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백상훈도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다. 초순진 이후로 백상훈의 마음 근처에 다가온 여인은 아카네가 처음이다. 아직 확신이 없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백상훈의 의례적인 답변을 들으며 아카네는 씁쓸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발길을 돌리는 백상훈을 원망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파리나 런던에서 온 아리따운 유럽 여성이었다면 과연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혹시 내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보니 백상훈이 수업을 마치고 나서 유럽 여성들에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환담을 나누지  않았던가.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한일간의 갈등  때문에 자신이 그 피해를 보는 건지도 모른다. 아카네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백상훈의 무심한 듯한 태도에 낙심한 아카네가 힘없이 터벅터벅 숙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한 미모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게 뭐람. 아카네는 스스로에 대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백상훈에게 자신의 존재감이 미약했고, 자신의 미모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자존심마저 상했다. 백상훈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튈지 아카네로서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마음이 두 갈래 길로 나뉘고 있다. 자존심을 접고 백상훈에게 다시 한 번 다가가기 위해 기회를 노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인연을 찾아 백상훈을 깔끔하게 포기할 것인가.  지금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두 갈래 길 사이의 어디쯤에서 마음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람은 방 안을 돌아다니는 파리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는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고 한다. 지금 아카네의 마음이 바로 그러했다. 

<계속>

 

편집 :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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