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가 변호사와 상의했지만 변호사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단 살인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재판을 통해 무죄를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마쓰다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엠마에게 폭행을 가하며 위협하던 베트남인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엠마 오빠와의 일로 엠마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엠마에게 나중에 보자며 위협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변호사를 통해 그들이 살인을 했을 가능성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수사 5계에서는 마쓰다의 제보를 바탕으로 엠마를 위협했던 베트남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쓰다는 안도했다. 살해범이 밝혀지면 자신은 무혐의로 풀려날 것이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엠마를 위협했던 베트남인들은 엠마가 살해된 날의 알리바이가 확실했다. 엠마가 살해된 시각에 그들은 도쿄가 아닌 나고야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낱 같은 기대가 사라지고 있었다. 희망도 기대도 다 사라지고 살인자로 기소될 판이었다. 변호사에 의하면 마쓰다가 엠마를 살해했다는 물적인 증거는 없지만 살해 정황은 충분한 것으로 경찰이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쓰다는 끝도 없이 어두컴컴한 무간지옥으로 쳐 박힌 느낌이 든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고 지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제 보니 인생을 너무 헛살았다. 바보같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지옥에 빠진 심정이 된 마쓰다는 문득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생각났다. 나쁜 피, 지옥의 밤, 2년에 걸친 탕아의 길. 랭보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마쓰다는 랭보가 2년에 걸쳐 경험한 자기 탕진의 느낌을 불과 이틀 만에 맛보고 있었다. 지난밤에 해변가의 관능적인 여인을 보며 꿈속에서 품었던 야하고 음란한 마음, 연민을 핑계 삼아 베트남 여성 엠마에게 자신의 음욕을 채우려 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로 인한 자책감이 마쓰다를 괴롭히고 있었다. 마쓰다는 그제야 깨달았다. 간밤에 꾸었던 야한 꿈은 단순한 개꿈이 아니라 여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는 것을. 

자신의 처지에서 랭보를 연상한 마쓰다는 랭보의 시집 마지막 장 ‘고별(Adieu)’의 문구가 떠올랐다. 

- 그러나, 지금은 아직 전야다. 

생기와 현실의 애정이 흘러 들어오는 모든 것을 수용하자.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마쓰다로서는 일생일대 최대의 시련이 다가왔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치명적인 상황에 직면한 건 아니다. 폭풍전야는 아니라 해도 무엇인가의 전야인 것만은 틀림없다. 랭보의 표현대로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 하지만 여명의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저 미지의 암흑만이 그의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여명이 밝아오지 않는다 해도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있어야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고 마쓰다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 출처 : 한겨레신문
게티이미지뱅크 / 출처 : 한겨레신문

도쿄 치요다구(千代田区)에 위치한 도쿄 경시청에서는 수사 1 과장이 살해범 수사 5 계장에게 '베트남 여성 흐엉(일명 엠마) 살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수사과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피의자 마쓰다의 혐의는 무언가?" 

"성매매를 빙자하여 흐엉을 성추행 후 교살한 혐의입니다." 

"마쓰다가 흐엉을 살해할만한 살인 동기가 분명하지 않단 말이야. 마쓰다의 성품으로 보아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를 만큼 무모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남녀 간의 일은 단정 짓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평상시에 온화하고 유순해 보이는 사람들도 종종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곤 합니다." 

수사과장과 수사 5 계장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다른 단서는 없는가?" 

"흐엉에 대한 제보가 많이 들어오고 있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제보는 아직 없습니다." 

"마쓰다를 살인범으로 단정 짓지 말고 다른 단서가 있는지 확인해 봐. 모텔 내부와 주변을 샅샅이 정밀 수사를 하도록." 

다음 날이 되자 수사 5 계장이 수사과장에게 긴급 보고를 했다. 

"모텔 내부를 정밀 감식한 결과 흐엉이 살해당하기 전에 모텔 뒤쪽 창문을 통해 누군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범인은 미리 숨어있다가 마쓰다가 약을 사러 나간 사이에 범행을 저지른 듯합니다." 

"그 자의 행적을 찾았는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베트남인을 잡아서 심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자는 지난밤에 마쓰다가 술 마시고 몸싸움을 벌인 베트남인 두 명과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자백을 받았는가? 창문을 칩입한 흔적에서 물증은 확보했나?" 

"아직 자백은 받지 못했지만, 침입할 때 남긴 발자국과 운동화를 정밀 감식 중에 있습니다." 

그날 저녁 무렵 수사 5 계장이 수사과장에게 최종 결과를 보고했다.

"정밀감식 결과 운동화와 발자국이 일치하였고, 범인으로부터  자백도 받았습니다." 

"잘했군! 그렇다면 이번 '베트남 여성 흐엉 살해 사건'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본 내 베트남 조직 폭력배 간의 싸움에 흐엉이 희생되었다 - 이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입니다. 최근 일본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의 범죄율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에 있으며, 심지어 중국인 범죄율을 추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중에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위를 유지했었지. 그러다가 2020년부터 베트남이 1위를 차지하기 시작했어. 그러니 범죄율도 그에 비례해서 급증할 수밖에 없을게야." 

수사과장도 얼마 전에 뉴스를 통해 알았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우 돈을 벌러 일본에 입국하는 노동자들이 많은데 자국의 일인당 국민 소득(GDP)이 7000달러를 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일본으로의 유입이 줄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인재정보업계에 따르면 중국이 이 길을 걷고 있으며 최근 들어 일본으로의 중국인 노동자 입국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거주 베트남인 범죄율 급증으로 인해 골치가 아프구먼. 그렇지 않아도 상부에서 대책을 세우라고 난리인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마쓰다는 어떻게 처리할 건가?" 

"진범이 잡혔으므로 완전히 혐의를 벗었습니다. 금일 바로 석방해도 좋을 듯합니다."

수사과장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마쓰다 석방은 잠시 보류하게." 

'범인이 잡혔는데 더 이상 마쓰다를 구금할 근거가 없습니다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수사과장이 자신의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세로로 갖다 대며 말했다. 

"이건 극비 사항이네. 내각정보조사실로부터 협조 요청이 들어왔어. 별도 연락이 있을 때까지 마쓰다를 구금해달라고 하는군. 물론 수사 진척 사항도 당분간 기밀에 붙여달라면서 말이야." 

"하이! 알겠습니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마쓰다를 구금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쓰다는 마냥 구치소에 있었다. 그럴 즈음에 누군가 면회를 요청했다. 검은 복장을 한 사내가 면회소에 나타나더니 마쓰다에게 넌지시 말했다. 

"모리 국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마쓰다 상에게 벌어진 이 상황을 국장님이 몹시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마쓰다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모리 국장인들 이 상황에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마쓰다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모리 국장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마쓰다 상을 구치소에서 꺼내 줄 만한 영향력이 있는 분입니다." 

실로 절묘한 상황에서 모리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마쓰다로서는 굳이 모리의 도움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모리가 자신을 꺼내 주는 대신 무언가를 요구할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흠!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소?" 

 

예언자 - 무료이미지 /  pxhere.com
예언자 - 무료이미지 /  pxhere.com

" 아주 쉬운 일입니다. 인도 예언가의 예언을 동북아재단의 이름으로 발표만 해주시면 됩니다. 예언가와 예언 내용은 물론 신문에 실릴 기사까지 이미 다 준비되었습니다. " 

마쓰다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결국 이거였나? 이러려고 엠마를 접근시키고 자신에게 살해 혐의를 뒤집어 씌운 건가. 마쓰다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모리의 음모이자 모략이었다. 모리가 괘씸했지만 지금으로선 그 자와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한 가지 더 요구하기로 했다. 

"모리 국장이 원하는 대로 다 하겠소. 대신에 애초에 모리 국장이 제안한 대로 내 모친의 수술비까지 지원해주면 좋겠는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그럴 줄 알고 국장님이 이미 수술비를 지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쓰다는 천당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인생의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기어이 양심을 포기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이 길이 최선이다. 마쓰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마쓰다가 졸지에 겪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결국 이렇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마쓰다가 석방된 지 이틀 후, 연예인의 동향과 가십을 다루는 '선데이 모리츠' 주간지에 실린 인도 예언가 카마르의 예언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기사에는 동북아재단이 수년간 전 세계의 예언가들을 상대로 면밀하게 조사한 보고서의 일부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인도 예언가 카마르는 일본이 20년 후에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되고 1900년대 중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지역을 지배했던 옛 제국주의의 영광을 되찾게 될 거라는 예언을 했다. 또한 북한의 연이은 핵도발로 인해 한반도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 쑥대밭이 될 거라는 파격적인 예언을 했다. 카마르의 사진과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카마르는 힌두교의 최대 성지 바라나시 출신으로 인도의 저명한 신비주의자 메어 바바의 수제자이며 일찍이 북한 김일성의 죽음과 김정일의 죽음을 정확히 예언했다고 한다.

일본의 보수 정객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일본 시민들은 그 기사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시민들은 일본이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거라는 예언에 환호하는 그 이상으로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될 거라는 예언에 더 큰 환호를 보내며 기뻐하고 있었다.

경시청 수사과장은 뉴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쓰다가 석방되자마자 동북아 재단 명의로 카마르의 예언이 언론에 공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쓰다가 있었다. 내각정보조사실에서 마쓰다와 관련하여 모종의 공작을 꾸민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엠마 살해범의 자백에 따르면 범인은 엠마가 그 모텔에 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창문을 통해 잠입해 있었다고 했다. 

내각정보조사실에서 엠마로 하여금 마쓰다를 호텔로 유인하게 해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폭력 조직원 일당에게 정보를 흘렸다면? 그러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심증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이로써  모리 국장은 수사 과장에게 신세를 한 번 진 셈이다.

수사 1 과장은 이쯤에서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다. 도쿄 경시청에서는 이번 사건을 '베트남 범죄조직 간의 세력다툼'으로 언론에 짤막하게 브리핑했고 그로써 '베트남 여성 흐엉 살해 사건'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계속>

 

편집 : 안지애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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