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 옮긴 자연, 산수

다음 '화폭에 옮긴 자연, 산수'에서는 자연의 풍경이 담긴 산수 인물화를 소개했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이상적인 풍경과 현실 속의 풍경을 화폭에 옮겨 자연을 향유하였다. 정선을 비롯한 조선시대 산수화가들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통해 화폭에 담긴 자연 풍경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특히 정선(鄭敾, 1670-1759)의 <만폭동도>(萬瀑洞圖)와 <혈망봉도>(穴望峰圖)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정선(鄭敾, 1670-1759)의 <만폭동도>(萬瀑洞圖)
정선(鄭敾, 1670-1759)의 <만폭동도>(萬瀑洞圖)

만폭동은 금강산의 절경 중 하나로 보덕궁, 혈망봉 등 내금강의 물줄기가 한데 모여드는 곳이다.

정선은 만폭동을 그릴 때 항상 물길이 모여드는 너럭바위를 가운데에 두고 내금강의 봉우리들을 병풍처럼 두르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실제로는 한 화면에 잡히지 않는 정경으로 정선의 만폭동 일대의 경관을 그림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정선이 경관을 마주하고 난 뒤의 감흥을 빠른 붓질로 휘감기로 풀어낸 휘쇄(揮灑, 붓을 휘두르고 먹물을 뿌림) 필법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떠 올렸다.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에 잦았으니 들을 때는 우레더니 보니까 눈이로다. <관동별곡> 중 만폭동을 묘사한 부분이다.

그 뒤 조선말 유척기(兪拓基, 1691-1767)는 송강의 이 관동별곡을 읽고 만폭동을 한시(漢詩)로 이렇게 읊었다.

化翁何事施奇工
萬壑千峰特地雄
開却如雷看如雪
松江歌曲最形容

조물주는 무슨 일로 있는 솜씨 다 부렸는가?
첩첩 겹친 깊고 큰 골짜기 그 모두 독특, 웅장하여라.
들을 때는 우레 같더니 보아하니 눈 같구나.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 으뜸으로 그려 냈네.

또 정선의 친구 사천(木+差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은 만폭동의 경광을 이렇게 읊었다.

擾擾側峰爭隙地
蒼蒼橫嶺界高秋
洞開洞裏不窮路
潭落潭中無靜流

삐죽삐죽 기운 봉우리 빈 땅을 다투고,
푸릇푸릇 빗긴 고개 높은 가을에 닿았네.
골짝 열려 다른 골짝 속으로 드는 길 끝이 없고,
못물 떨어져 다른 못물 속으로 흐름에 쉼이 없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사천은 시를 쓰고 정선은 그림을 그렸다. 대부분의 정선 그림에는 사천의 시가 화제로 쓰였다. 좌측엔 사천의 시, 우측엔 정선의 그림(左사川, 右謙齋)이란 이를 말한 것이다.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 우측 상단에는 "千岩競秀 萬壑爭流 艸草蒙籠上 若雲興霞藯 顧愷之" 라는 화제(畵題)가 있다.

"천개의 바위가 솟기를 겨루고 만개의 골짝은 흐르기를 다투네. 풀 나무 그 위로 올라 몽롱한 것이 구름 크게 일고 노을 가득 낀 양 하더라" 고개지의 시다.

이 고개지의 싯귀를 누가 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연희는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후배나 후손이 썼을 것이라 했다.(<그림, 문학에 취하다> 교보문고, 299-302 2011)

누군가는 <만폭동도>를 보고 음악이라 했다. 넓은 계곡을 휩쓰는 골바람이 온 산을 한 무리 악사로 여겨 한결같은 장단으로 흔들어대면, 탄력 넘치는 붓질로 신명나게 뽑아 올린

노송 줄기는 굵었다, 가늘었다 흥겨운 가락을 타며 자연의 춤사위를 보인다. 그러자 콸콸 쏟아져 내리는 여울물이 이리 돌고 저리 돌고 곤두박질치다가 깊은 소(沼)에 이르러 제멋에 겨워 빙빙 도니, 그림 속에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중중모리 같은 빠른 붓질!

사람들은 '後有元佰畵 前有季涵詞'라 했다. '이후에는 정선의 그림, 이전엔 정철의 가사'란 뜻이다.

만폭동 바위에는 '蓬來楓嶽元化洞天'이라 쓴 양사언의 초서 글씨도 있다.

우리는 다시 <혈망봉도>(穴望峰圖) 앞으로 갔다.

<혈망봉도>(穴望峰圖)
<혈망봉도>(穴望峰圖)

혈망봉은 내금강의 일출봉(日出峰) 서편에 위치한 암봉(岩峰)으로 가운데 뚫려있는 구멍에 연유되어 붙여졌다.

이 작품은 청색이 섞인 담묵(淡墨)으로 처리되어 고고하고 깨끗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선은 실경산수를 그릴 때 초기에는 사생에 가까운 정확한 필치를 구사하다가 말년에는 수직준(垂直준), 난시준(亂柴준)과 같은 독특한 속필화법(速筆畵法)을 구사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거침 없이 아래로 죽죽 그은 수직준이 혈망봉의 높고 험준한 기세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높고 깊게 솟아 오른 봉우리들이 뚫려있는 구멍 주위를 감싸듯 열립(列立)해 있고 그 사이 열려진 틈새로 유유청승(幽幽淸勝)한 사우(寺宇; 절)가 보인다.

겸재는 이 그림에서 암봉(岩峰)의 골기(骨氣)를 단속적인 수직준(垂直준)의 재빠르고도 방일(放逸)한 필세로 어느 정도 화면(畵面)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화면에 미묘한 의혹을 유발 시키는 난숙한 필치라든가 담채(淡彩)의 효과 등은 그의 만년(晩年)의 진경화법(眞景畵法)을 특징짓는 요소들로서 그림 상단에 찍혀있는, 그가 주로 최만년(最晩年)에 사용했던 '謙齋'(겸재)라는 '백문장방인'(白文長方印)의 존재와 더불어 이 그림의 제작 시기를 시사해 준다.

<혈망봉도>는 이 밖에 또 한 점이 있는데 개인소장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이 그림이 보다 노숙한 경지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한국의 미1> 겸재 정선 도판해설. 198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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