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벗, 사군자

'사군자'는 4개의 군자(君子)란 뜻으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함께 지칭한 단어다.

조선의 선비들은 흔히 매란국죽(梅蘭菊竹)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였다.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보이는 이러한 식물들이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에 비유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매화는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이러한 매화의 특성은 세속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군자의 모습에 비유됐다.

다음으로 난초는 알아주는 이 없어도 깊은 숲속에서 꽃을 피우는 특성이 있다. 이를 춘추시대(春秋時代)의 공자(孔子)가 절개를 지키는 꿋꿋한 군자의 모습에 비유하면서 난초가 사군자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화는 가을 서늘한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우는 특성이 마치 군자의 모습과 닮았다고 여겼다.

마지막으로 대나무는 곧은 몸과 변하지 않는 군자의 모습과 절개를 지닌 군자의 품성에 비유되어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조선의 문인들은 군자로서의 여러 덕목을 지니고 있었던 사군자를 곁에 두고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서예적 필법이 활용된 사군자화가 문인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이처럼 사군자는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문인들의 뜻을 대변하는 그림이었다. (전시실 설명문 참조)

여기에는 여러 사람의 사군자가 전시되어 있었으나 그중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묵매도(墨梅圖)>가 가장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묵매도(墨梅圖)>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묵매도(墨梅圖)>

조희룡은 19세기를 대표하는 여항인(閭巷人) 화가다. '閭巷人'이란 기술직이나 실무직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신분적으로 양반과 평민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중인'(中人)으로도 불렀다. 이들은 신분적 한계를 딛고 문인의 문화를 지향하며 19세기에 문예활동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조희룡은 당시 이러한 여항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또 시 짓는 모임인 시사(詩社) 활동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의 교류를 통해 양반을 능가하는 문예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매화를 무척 좋아하여 기존과는 다른 독창적인 화풍으로 매화를 그렸는데, 여기엔 <묵매도> 외에 <홍매도>(紅梅圖), <백매도>(白梅圖)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처럼 그는 매화로 자신의 개성을 신분적 한계를 넘어 문예계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여기 전시된 <묵매도>는 굵은 매화 줄기를 원판 하단에서부터 둥글게 펼쳐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줄기의 경계가 분명치 않아 마치 매화 숲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줄기는 담묵선과 점으로 간단히 처리했지만 가지는 좀 더 진한 먹으로 분명하게 그렸고, 가지 끝에 무수히 많은 꽃을 그려 넣었다.

그림 왼쪽 하단에 '丹老'(단노) 란 낙관이 보인다. 이는 그의 호 壺山(호산), 又峰(우봉), 滄洲(창주), 石憨(석감), 鐵笛(철적), 丹老(단노), 梅叟(매수) 등의 하나이다.

조희룡의 <묵매도>를 보고 옆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한송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한송, 미안하오! 함께 하지 못해. 그래 다들 나왔소?" 범산의 전화다.

오전 업무를 마치고 3시쯤 나오기로 했는데 업무가 아직 끝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겠단다. "그래요. 정재 빼놓고 다들 나왔어요. 헌데, 우영이 그만 넘어져 다쳐서 도중 병원 치료받고 집으로 갔어요." "어쩌다! 그래, 많이 다치지는 않았소?" 몹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이렇게 범산과 전화 통화를 하고 다시 옆 조희룡의 <홍매도>와 <백매도>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희룡의 <홍매도>
조희룡의 <홍매도>
조희룡의  <백매도>
조희룡의  <백매도>

이 두 작품은 <편우영한첩>에 수록된 것으로써 가늘게 뻗은 줄기 ,조그마한 태점(苔點), 조심스럽게 표현한 필법 등 조희룡 특유의 거친 필치의 매화도와는 다른 마감으로 그려졌다. 그는 화면의 여백마저도 글씨로 빽빽이 채움으로써 서화일치(書畵一致)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었다.

조희룡은 연한 먹으로 가느다란 줄기를 잡고 붉은 매화꽃은 염료를 써서 동글동글하게 찍어 내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화면에는 매화를 신선의 단약(丹藥)에 비유하는 글을 적었다.

<백매도>는 그가 후기에 그린 거친 필치와는 달리 차분한 묵법(墨法)과 부드러운 필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꽃잎은 두 번의 붓질로 잎 하나를 그리는 양필권법(兩筆圈法)으로 그려져 있다. 조희룡은 매화를 신선에 비유하여 그만의 독특한 매화관(梅花觀)을 드러냈다. 조희룡의 매화관은 그가 개성적인 화풍으로 매화를 그릴 수 있었던 하나의 묘안이 되었을 것이다(전시실 작품해설 참조)

이때 우사가 한송에게 "한송, 저기 우리 5대조께서 그린 매화그림 있네"하며 한송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거기엔 이공우(李公愚, 1805-1877)의 <매화도(梅花圖)>가 있었다.

이공우(李公愚, 1805-1877)의 <매화도(梅花圖)>
이공우(李公愚, 1805-1877)의 <매화도(梅花圖)>

도정(都正)을 지낸 이공우는 연안인(延安人)으로서 호가 석연(石蓮)이며 월사(月沙, 이정귀) 후손으로 우사(雨沙, 이덕훈)의 5대조이다.

이공우는 당시 매화 그림으로 잘 알려졌다. 김정희(金正喜)가 그의 매화 그림을 칭찬했다는 기록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전한다.

여기 이 <매화도>는 비백(飛白)이 드러나고, 나무의 뒤틀림이 적게 표현된 점에서 조선 중기 매화도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먹의 농담(濃淡)을 조절하여 매화 줄기 사이의 거리감을 잘 표현하였고 꽃잎에 붉은색의 담채를 살짝 가하여 산뜻한 느낌을 가미하였다.

우사는 "한송, 우리 집 내방에 5대조께서 그린 <월사매도>(月沙梅圖)와 <백매도>(白梅圖)가 걸려 있네"하며 은근히 선조 자랑을 했다. ㅎㅎㅎ

우리는 이공우의 이 <매화도>를 본 뒤 서예의 획을 보는듯한 힘 조절이 느껴지는 김정희(金正喜, 1781-1856)의 <묵란도(墨蘭圖)>

김정희(金正喜, 1781-1856)의 <묵란도(墨蘭圖)>
김정희(金正喜, 1781-1856)의 <묵란도(墨蘭圖)>

괴이하게 뒤틀린 돌인 괴석(怪石)을 잘 그리는 것으로 이름난 공한재(孔韓齋)의 그림을 모방한 정학교(丁學敎, 1832-1914)의 <묵란도(墨蘭圖)>를 둘러 보고,

정학교(丁學敎, 1832-1914)의 <묵란도(墨蘭圖)>
정학교(丁學敎, 1832-1914)의 <묵란도(墨蘭圖)>

다시 옆 전시실로 가서 후원에서 쉬고 있는 기방(妓房)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신윤복(申潤福, 1758-?)의 <후원여인도(後園女人圖)>

신윤복(申潤福, 1758-?)의 <후원여인도(後園女人圖)>
신윤복(申潤福, 1758-?)의 <후원여인도(後園女人圖)>

중인 계층의 시사(詩社)인 벽오사(碧梧社)의 구성원 중 나이가 많은 5명의 인물이 모인 '오로회'(五老會)의 장면을 그린 유숙(劉叔,1827-1873)의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등

유숙(劉叔,1827-1873)의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유숙(劉叔,1827-1873)의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

풍속도를 둘러보았다.

편집자 주 : 5편으로 이어집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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