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風波)에 놀란 사공(沙工)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나 하리라

광해군과 인조 때 조정의 중추로 활약했던 장만(張晩, 1566-1629)의 시조다. 장만은 문신(文臣)이면서 장군이었다. 따라서 이 시조는 바로 자신의 세상살이, 즉 벼슬살이를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겪어보고 자연에 순응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장만은 국방 대책을 장만하고 추진했던 인물이다.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대응 전략을 그에게 물어 결정하곤 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은  바로 장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인조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귀하게 썼다. 인조는 장만이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더욱 그를 신망했다. 정묘호란(1627)이 터지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때 장만은 강화도에 없었다. 후금군을 막는 총사령관이 되어 뭍에서 분투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벌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에서 전쟁을 종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때 인조가 후금을 형의 나라로 모시기로 하고 후금과 강화 조약을 맺은 곳이 연미정(燕尾亭)이다.

인조가 후금과 형제의 조약을 맺은 연미정
인조가 후금과 형제의 조약을 맺은 연미정

정묘호란이 끝나자, 신하들은 후금군을 격퇴하지 못한 장만을 처벌하라고 외쳤다. 자기들은 안전한 강화도에 있으면서, 육지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후금군에 맞섰던 장만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빗발치는 처벌 요구를 인조는 계속 거부했다.

그때 장만이 인조에게 청했다. 자신을 귀양보내 달라고.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귀양 갔다. 왜 스스로 유배형을 청했을까? 그건 자기 부하 장수들을 지키려는 부하사랑에서  그러한 것이다. "어차피 조정은 희생양을 찾을 것이다. 내가 안 가면 내 부하들이 다치게 될 것이다. 부하들을 보호하려면 내가 벌을 받아야 한다." 장만은 이렇게 생각했다.

장만이 세상을 떠나자, 최명길이 그의 일생을 정리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오랫동안 병권을 잡고 있어, 나라의 무인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하다가 일이 이뤄지면 공을 그 사람에게 돌리고, 일이 실패하면 그 허물을 자신이 덮어썼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에게 쓰이는 것을 즐거워했다." 일이 이뤄지면 공을 그 사람에게 돌리고, 일이 실패하면 그 허물을 자신이 덮어썼다. 얼마나 아름다운 지도자상인가!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요즈음의 정치지도자들이 귀담아들을 대목이다. 내로남불!

그가 죽고 9년 뒤, 병자호란이 났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의 굴욕'을 마치고 궁궐로 돌아갔다. 청나라로 끌려가던 수많은 백성이 임금을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그냥 '임금'이라 하지 않았다. '우리 임금'이라 했다. 우리 임금님은 백성들의 절규를 못 들은 척, 그냥 갔다.

버림 받은 백성들은 그렇게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때 하늘에서 장만의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나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7월 8일, 토요일 

 

오늘은 지난주 약속한 강화 서해호 가는 날이다. 정오 12시, 김포 한송(漢松, 정우열) 집 앞 한신더휴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11시 30분, 용연(龍然, 정용택)이 멀리 전곡의 탄월(灘月, 김원택), 일산의 경산(駉山, 홍형기)을 픽업해 함께 왔다. 합정동에서 차를 기다리는 우사(雨沙, 이덕훈)가 차를 제시간에 못 잡아 12시가 훨씬 넘어서 도착했다.

우사 김포 한신더휴 도착(G6000)
우사 김포 한신더휴 도착(G6000)

오랜만에 바닷바람 쐬며 매운탕에 소주잔을 기울일 생각이었으나, 용연이 "서해호가 며칠간 휴업을 한다" 한다. 서해호는 우리가 자주 찾는 횟집이다. 한데, 아마 요즘 후쿠시마 오염수 관계로 전국의 어업인들이 쉬는 모양이다. 실은 오늘 서해호에서 점심을 먹고 장만의 사당을 찾아 참배할 계획이었다.

학창 시절 장만의 "풍파에 놀란 사공..."을 외웠으면도 장만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몰랐다. 어느날 우연히 <김포신문>을 읽다가  장만에 관련된 기사를 읽고 장만의 책임 정신과 부하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그때 사당이 김포 통진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점심 어디서 할까?" 용연의 말에 경산이 차를 '수라정'으로 몰라 한다. 수라정, 정말 임금의 밥상 그대로다. 진수성찬!

강화 수라정에서 점심
강화 수라정에서 점심

점심을 배불리 먹고 잠시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눈 뒤 한송의 안내에 따라 차를 통진향교로 몰았다.

통진향교는 군하리에 위치해 있다. 한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수백 년 묵은 듯한 느티나무만이 말없이 우릴 반긴다.  안내판을 보니 고려 때 창건된 오래된 향교이다.

통진향교
통진향교

다시 장만의 사당을 찾기로 하고 네이버에  검색했다.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380번지' 통진향교에서 멀지 않은 거리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목적지에 차를 세웠다. 한데, 사당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안내판도 없다. 다만 밭인지 마당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산자락에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만 한 채 보인다. 마침 밭에서 오디를 따는 사람이 있어 "옥성사가 어디죠?" 하니 "저기여"한다. 가리키는 쪽으로 가보니 그 콘크리트 건물 뒤 숲속에 '玉誠祠'가 있다. 

장만의 사당 '玉誠祠'
장만의 사당 '玉誠祠'

생각과는 다르게 초라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영정에 참배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밖에서 잠시 묵념으로 예를 갖췄다.

지붕 위엔 잡초가 무성하고 안 현판은 나무에 가려 겨우 '玉誠' 두 자만이 보인다. 이 '玉誠祠'를 배경으로 우사와 한송이 인증사진을 찍었다.

옥성사 앞에서 한송과 우사
옥성사 앞에서 한송과 우사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문무를 겸비한 그였지만 말없이 조용하다. 인생의 무상함을 보는 듯 했다. 어디선가 "이 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나 하리라!" 하던 장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도자의 상이 무엇인가를 생각 해 본  좋은 하루였다.

2023. 7. 11 초복날
김포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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