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도록
마음이 아리도록
가슴이 시리도록
곱디고운 詩들은

그러한
아픔과
고독함
외로움
번민과 고통이
씨앗이 되어

그렇게
아름다운 꽃 詩로
탄생이 되어지나
봅니다.

영민하던 27세
난설헌의 일생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
그 절절한 외로움과 사무치던 그리움!

위의 글은  <여안당 편지> -꿈에서 광상산을 유람하며 시를 읊다-(한겨레:온)를 읽고 대구에 사는 제자 현송(玄松, 정일한의원 원장)이 보내온 난설헌 애모 시다.

바로 "현송, 보내준 난설헌 애모 시 잘 읽었네. 恨의 昇華! 그래, 아름다운 꽃 詩로 탄생하였네. 현송, 오늘은 병원 진료 마치고 친구들과  난설헌 묘소 찾아보려 하네." 하고 답글을 보냈다.

그 뒤 바로  또 "아! 교수님 가까이 산다면 저도 그 탐방객에 끼이고 싶네요. 아쉽습니다"
하고 현송의 답글이 왔다.

18일 목요일, 36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 그날 진료를 마치고 용연(龍然, 정용택)이의 차로  멀리 한탄강변 탄월(灘月, 김원택), 일산 백석의 경산(駉山, 홍형기), 그리고 문정동의 우사(雨沙, 이덕훈)와 함께 경기 광주 초월면 안동김씨 선영을 찾았다. 30년 전에 찾아왔었다는 용연의 기억이 없었다면 아마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다음 날 또 현송의 카톡이 왔다. "교수님, 그래 어제 무더위 속에 난설헌 묘소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가셔서 뭐라 하셨어요? 또 난설헌은 뭐라 하시던가요?  혹시 '어째 이제 오셨나요?' 하진 않으시던가요?  ㅎㅎㅎ"

바로 또 현송에게 답글을 보냈다. "어허~ 무더위 속에 잘 다녀왔네."

묘소 지번이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39-5번지로 돼 있더군.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치고 안내에 따라 한강 변을 왼쪽으로 끼고 중부고속도를 타고 얼마쯤 가니 오른쪽으로 '허난설헌묘' 표지판이 보이더군.

허난설헌묘 표지판
허난설헌묘 표지판

안내판을 지나 다시 얼마쯤 가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니 오른쪽으로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安東金氏書雲觀正公派) 하당공계 묘역(荷塘公系 墓域) 하당공휘첨.난설헌 허초희지묘(荷塘公諱瞻.蘭雪軒 許楚姬之墓)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90호' 란 표석이 보였네.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묘역 안내 표석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묘역 안내 표석

이곳 지월리(止月里)는 설월(雪月), 경수(鏡水)의 두 마을을 합쳐 지어진 이름이라 하네.

한데, '雪月'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된 동기는 경상도의 선비가 과거 보러 가던 중 하루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내린 눈 위로 달빛이 비쳐 선경(仙鏡)처럼 아름다웠기에 부쳐진 것이고, '鏡水'는 조선 선조 때 이 마을에 낙향해 살던 노은(老隱) 김정립(金正立, 1579-1648)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해 '明鏡止水'라 한  말에서 '雪月'의 '月' 자와 '止水'의 '止' 자를 따서 '止月'이라 했다고 하더군. 하나, 지금은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가 나고 주위가 공장지대가 되면서 옛 그 경광은 찾아볼 수 없었네.

표석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얼마쯤 가니 높이 묘역이 보이더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묘역 왼쪽을 보니 '慕先齋'란 현판이 보였네. 현송, 이 건물이 허난설헌과 그의 남편 김성립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더군. 잠시 쉬었다 오른 쪽으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니 아래. 위로 묘역이 보이는데 위는  종중 선영이고, 그 아래에 허난설헌의 묘가 있더군.

원래 난설헌의 묘는 현재의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안동김씨 선산인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하네.

허난설헌의 묘 오른편에는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딸의 묘가 있고, 바로 위에 남편 김성립의 묘가 후처 남양 홍씨와 함께 안장돼 있었네. 난설헌은 죽어서도 이처럼 남편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따로 외로이 묻혀있더군! 현송, 그래서 그런지 무덤 변두리 떼가 돌아가면서 모두 말라 죽었더군.

허난설헌 묘
허난설헌 묘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묘비, 시비 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문인석을 빼고는 모두 최근에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었네.

묘역 석물
묘역 석물

여기 묘소 왼쪽의 시비(詩碑) 는 이장할 때 세운 것으로 앞면엔 난설헌이 딸, 아들을 잃고 애통해하면서 읊은시,  '哭子'(<한겨레:온> 여안당일기 참조)가 번역문과 함께 새겨져 있고, 뒷면엔 규방의 원한을 읊은  '閨怨'(<한겨레:온> 여안당 일기 참조)이 새겨져 있네.

       허난설헌 시비
       허난설헌 시비

묘의 오른쪽의 묘비도 최근 오석으로 만든 것으로서, 앞면에 '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 새겨 있고, 돌아가며 뒤로 국어학자  이숭녕(李崇寧)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더군.

        허난설헌 묘비
        허난설헌 묘비

그리고 난설헌 묘 옆의 아들, 딸 묘에도 묘비가 있는데, 이 묘비 역시 최근에 세운 오석비로  앞면에 하곡(荷谷) 허봉(희윤의 외삼촌)의 '喜胤墓誌'가 새겨져 있네

하곡 허봉이 지은 희윤의 묘지
하곡 허봉이 지은 희윤의 묘지

苗而不秀者喜胤
喜胤父曰誠立 余之友也 涕出而爲之銘曰皎皎其容
 晰晰其目 萬古之哀寄一哭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희윤의 아버지 誠立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瞻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哭에 부치노라

조카에 대한 외삼촌의 애통함함이 담겨있네. 뒷면엔 이 비를 세운 안동김씨 서운관정파 종중회 이사장 金學永과 원문을 번역한 陽堤 金在峻의 이름이 새겨져 있더군. 묘역의 넓이는 100평, 크기는 높이 275cm, 너비 108cm.

현송, 막걸리 한 병, 오징어 한 마리 꿰차고 묘소 올라가 묘전에 술 따라 올리고 난설헌 누님께 이렇게 말했네.

누님, 당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께선 20년 전 돌아가신 황진이(黃眞伊, 1506-1567) 무덤에 술 따르면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을 어디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勸)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했는데, 누님 가신 지 433년이 지난 오늘 한송(漢松, 정우열) 저는 이제야 누님 묘전 찾아와 잔 올립니다.

묘전에 술을 올리는 한송과 용연
묘전에 술을 올리는 한송과 용연

난설헌 누님, 너무 늦게 찾아왔죠!?

누님, 세월이 많이 바뀌었어요. 만일 누님이 요즘 태어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허나 누님 가신 뒤 많은 사람이 남기신  그 많은 시를 통해 누님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당시 누님이 그 재능을 마음껏 펴보지도 못하고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가셨음을 애통해합니다.

누님, 이젠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 다시 환생하시어 당시 못하셨던 연애도 하시고 꿈속에서만 하셨던 유람도 현실 속에서 마음껏 하세요.

참! 요즘 제가 <한겨레:온> '여안당일기'에 누님 이야기 올리고 있어요. 또  중국 복단대학 강좌교수로 가 있는 이영백(李英白) 교수가 누님을 주제로 한 소설 쓴다고 해요. 그 소설 완간되면 이교수와 함께 다시 찾아 올게요. 누님 안녕히 계세요.

현송, 이렇게 난설헌 누님과 이야기하고 왔네. 그래 난설헌 누님이 뭐라 하더냐고?

'執之兩個, 放則宇宙' 두 손으로 잡아봤자 두 개, 놓으면 우주가 다 내것이라 하시면서 모든 거 다 내려놓고 노년을 즐겁게 살다 오라 하시더군! ㅎㅎㅎ

현송, 밤이 깊었네. 언제 자네도 난설헌 누님 찾아보시게! 아주 반가워하실걸세! 내가 자네 이야기했으니...

2023.8.20.
한 밤중에  김포 하늘빛 마을 여안당에서 달구벌 정인당 현송에게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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