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이, 오늘도 무척 덥군!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 <採蓮曲> 일세.

가을 맑은 긴 호수에 옥 같은 푸른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 배 매어두고,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다가,
멀리서 남이 볼까 봐 반나절을 부끄러워 했네!

어느 곳에선 마지막 4련의 '遙'를 '畏', 또는 '或'으로 한 곳도 있네.

용연이,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이 대학 시절이네. 그때 한문 시간에 창명(蒼溟) 임창순(任昌淳, 1914-1999) 선생님으로부터 이 시를 처음 듣고 얼마나 황홀해했는지 모르네. 마치 영화의 러브신 한 장면을 보는 듯하여...

그뒤로 이 시는 나의 애송시가 되었네.

가을날 푸른 하늘!
하늘도 푸르고 호수도 푸르네!

아스라이 펼쳐진 파란 긴 호수 위로 그녀가 배를 띄웠네. 하늘과 물이 어우러져 시릴 듯 푸르른데.

繫蘭舟!

아가씨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연꽃 무성한 깊은 곳에 목란 배를 매어 두고 만나기로 한 님을 기다리네. 배를 깊숙이 숨겨놓은 것은 혹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일세. 이윽고 방죽 위로 님이 나타나고, 님은 내가 연꽃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네. 이를 숨어서 지켜보던 그녀가 연밥을 따서 님의 발치에 던졌네. "날 찾아봐라!" 하듯이.
ㅎㅎㅎ

投蓮子!  

여기 '蓮子'는 연꽃의 열매 연밥일세. 그러니 연밥을 던졌단 말이지.

용연이, 허나 여기서 '蓮子'(연자)는 '憐子'(련자), 즉 "그대를 사랑한다"는 속뜻을 담은 사랑의 고백일세. 말하자면 그녀가 물 건너로 던진 것은 그저 심상한 연밥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일세. ㅎㅎㅎ

용연이, 얼마나 멋진 러브신인가!

한시(漢詩)에 보면 그런 은유적(隱喩的) 표현이 많이 있네. 예컨대,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 '千絲'(천사)를 '千思'(천사)로 함께 읽게 하여 두서없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야릇한 봄 마음(春意)을 나타내는 것 등이 그것일세.

이때 '蓮'과 '憐', '絲'와 '思'는 중국 발음으로 똑같이 발음하네. 민화에서 복(福)을 나타낼 때 그림으로 박쥐(蝠)를 그리는 것도 같은 맥락일세.

이처럼 한 글자를 가지고 두 가지로 보는 것을 '雙觀'이라 하는데, 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에서만 가능하네. 이게 한시가 가지고 있는 묘미일세.

사실 난 이 작품이 허난설헌이 시집가기 전 쓴 작품이란 걸 훨씬 뒤에서야 알았으며 어제 말한 중국 여류시인 설도가 8살 때 아버지의 '詠梧桐'에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이라 화답 했듯이 난설헌도 8살에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었다는 것도 알았네.

난설헌은 강릉, 지금 전국 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초당두부 마을' 출신이네. '草堂'은 난설헌의 아버지 許曄의 호로, '초당두부'란 일찍이 이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두부 만드는 법, 즉 바닷물로 만드는 것을 계승한 것일세.

본명은 초희(楚姬), 또는 옥혜(玉惠)이며 자(字)는 경번(景樊)이고, 난설헌(蘭雪軒)은 당호(堂號)일세.

명종 18년(1563)에 태어나 선조 22년(1589)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네.

위로 오빠 허봉(許봉, 1551-1588), 아래로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許筠, 1569-1618) 있네.

8살 때 당시 삼당(三唐)의 한 사람인 이달(李達, 1539?-1612?)에게 시를 배워 8살 때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었다 하네. 어려서부터 천품과 재주가 뛰어나 신동(神童)이라 불렸다 하네.

1577년(선조 10년) 15살 때  김성립(金誠立, 1562-1592)과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시집식구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결혼생활이 원만치 못하였다 하더군.

결혼 뒤 동인의 영수였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이 객사하고 거기다 연이어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오빠 허봉이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는 등 불행한 삶이 연속됐네.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고 지은 시가 바로 <哭子>이네.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哀哀光陵土
雙墳相對起
蕭蕭白楊風
鬼火明松楸
紙錢招女魂
玄酒奠汝丘
應知弟兄魂
夜夜相追遊
從有腹中孩
安可冀長成
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

지난해 사랑하는 딸 여위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디슬픈 광릉 땅이여!
백양나무에 소슬한 바람 불고, 도깨비불은 무덤가 나무 밝히네.

종이돈 살라 너의 혼을 부르고, 정화수 올려 제사를 지낸다.
너의 넋은 응당 오누이임을 알지니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비록 배 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잘 크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고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슬퍼한다.

마지막 부분에 "비록 배 속에 아이가 있다 한들(從有腹中孩) 어찌 잘 크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安可冀長成)" 한것으로 보아  또 아이가 유산된 것 같군!

이처럼 그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성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작품의 특유한 시 세계를 이루었네.

그럼, 다시 규중 여인으로서의 불행했던 삶에 대한 고통을 표현한 <閨怨>(규원)을 함께 감상해 보세! (내일 계속)

2023. 8.6

한밤중에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이 원흥 용연에게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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