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

역사학은 해석학이다. 과거 사료나 문서를 읽어 일반인의 눈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고 의미를 되살리는 구체적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무채색의 사료에 역사의 옷을 입혀 선조들의 삶을 살아나게 만들고, 시공을 초월한 대화가 가능하도록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귀한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학자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안으로 자신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을 넘어 진실을 얼마나 담보하는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밖으로 새로운 사료와 새로운 시각 앞에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건설하고 10여 년 독립군을 양성한 뒤 러시아에서 구입한 신형무기로 무장시켜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간도 제1의 거부, 대한북로독군부 참모장 최운산 장군의 손녀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에 대한 역사학계의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과 봉오동 신한촌을 함께 건설한 김성녀 여사, 사병부대 시절부터 통합 독립군 대한북로독군부까지 봉오동에서 훈련 양성되는 독립군을 직접 먹이고 입히셨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10여년 훈련된 정예 독립군들이 치러낸 봉오동 독립전쟁의 처음과 끝을 모두 지킨 병참대장 김성녀 여사의 증언은 어느 역사학자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독립전쟁의 전투현장인 봉오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해 역사와 국제 정세에 해박했던 최운산 장군의 아들, 아버지 최봉우가 들려주는 북간도 무장투쟁사, 그 핵심인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 이야기는 우리 집안의 가족사를 넘어 민족적 자부심과 공동체에 대한 큰 사랑을 싹틔우는 거름이 되어주었다. 

독립운동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정치상황 탓인지 최근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소설과 평전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소설 ‘범도’와 평전 ‘민족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다. 일생을 홍범도 장군을 기리고 흠모했던 두 작가의 끈기와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나라를 잃고 독립군이 되어 저항했던 한 독립군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경의를 표하는 일은 귀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들이 기존연구의 한계를 그대로 담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홍범도 장군이 일반에게 크게 알려진 이유는 머슴 출신의 가난한 포수 홍범도의 굴곡진 일생 자체도 있지만 무엇보다 봉오동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이라는 설명이 가장 크다. 지난 몇십 년간 역사계는 봉오동전투를 지휘한 총사령관이 홍범도라고 잘못 설명했다. 연구 부족으로 인한 오류다. 그로 인해 영화나 다큐를 비롯해 봉오동 독립전쟁을 다룬 모든 역사 컨텐츠가 눈물겨운 빨치산의 투쟁으로 축소 왜곡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레닌에게 군복과 권총과 군복을 선물받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레닌에게 군복과 권총과 군복을 선물받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최근에야 홍범도 장군은 연대장으로 참전했다는 것이 사료를 통해 확인되고 봉오동 독립전쟁의 역사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령관 최진동, 참모장 최운산, 참모 최치흥 등 최씨 3형제가 오래전부터 봉오동에서 독립군을 양성했고, 무기구입, 군수품 마련 등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 학술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영화처럼 헐벗고 굶주리는 파르티잔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아니라 정규군끼리의 격돌이었다는 것이 규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군사학적 연구를 통해 기관총과 대포를 사용하는 현대전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얼마나 긴 기간의 준비가 필요한지 돌아보기도 했다. 봉오동 독립전쟁의 본질과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모든 나라에서 군대를 유지하는 이유는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국가 간 무기개발 경쟁이 치열하고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이 국방비로 지출되는 이유다. 평소 잘 훈련된 군대라야 유사시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최신 성능의 무기를 실전에서 잘 다루기 위해서는 사격훈련을 비롯한 매일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충분한 영양공급과 체력관리, 정신무장을 위한 학습과 교육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이것이 가능했다. 간도 제일의 巨富 최운산의 자금력이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 형성과 운영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신한촌 봉오동을 군사기지로 발전시킨 최운산 장군이 10년 이상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해 군사들을 훈련 양성하고 있었다.

1920년의 봉오동 독립전쟁은 일본군의 아리사까 소총과 독립군의 모신나강, 맥심기관총 등 신형무기가 격돌했던 현대전이었다. 1차대전에서 사용하던 무기가 세계대전 종료 후 봉오동으로 이동 배치되어 현대 전쟁사의 한 축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소설 '범도'에 홍범도가 총사령관직을 최진동에게 양보했다는 표현이 있다.  전쟁을 앞둔 부대장이 부하 병사들의 목숨이 걸린 전투 상황에서 지휘권을 선심 쓰듯이 내어줬다는 설명이다.  평전인 '홍범도장군'은 그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돈많은 최운산 형제는 식량과 군복와 무기 공급 등 군수만을 지원했고,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한 총사령관이 홍범도였다는  주장이다.

전쟁 중인 군대에서 지휘권은 생명이다. 10년 넘게 훈련 양성된 1천명에 가까운 정규부대 병사의 지휘권을 빨치산 활동을 하다 군자금 부족으로 국민회에 합류해 전쟁 개시 직전에야 봉오동에 도착한 홍범도에게 맡겼다는, 대규모 군대 조직에 참여한 경험도 없는 그가 며칠 만에 봉오동의 지형지물, 군수장비, 군사력까지 파악해 전투를 지휘했다는, 군대와 전쟁에 대한 군사학적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불가능한 주장이다. 

1920년 12월 25일자 독립신문, 봉오동 독립전쟁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20년 12월 25일자 독립신문, 봉오동 독립전쟁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20년 12월 임시정부 군무부가 북간도 독립전쟁에 대해 발표했다. 봉오동전투의 작전과 전투의 전개와 성과까지, 전쟁상황 전반에 대한 공표다. 이 포고문에 의하면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위치해 싸웠고 사령관 최진동은 독립수 아래 최고봉에서 이들을 지휘했다. 전투 후 개최된 회의에서 홍범도의 이른 퇴각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휘권에 관한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한가.  

최근에 이슈가 된 두 권의 책은  홍범도 장군을 봉오동의 영웅으로 그리느라 너무 많은 것을 간과했다. 특히 평전은 한 발 더 나가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인 최진동 장군을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한 친일파로 규정했다. 물론 작가가 일부러 그런 내용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예전 연변에서 나온 자료나 책을 인용한 것일 테다.
 

그러나 이제 다른 사료들이 더 업데이트 되었고, 논문에 의해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몇 십년 전의 오류가 2023년에 다시 출판되어 강조되고 있다.  역사 왜곡이고 명예 훼손이다. 사실 문화혁명기 중국은 참담했다. 지주였다는 이유로, 공산주의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망한 역사적 인물 최진동을 친일파로 몰고 폄훼했다. 공산당에 충성해 살아남으려는 후손의 자기 부정도 이 왜곡을 심화했다. 

자유시참변을 당해 동지였던 수많은 부하를 잃은 최진동 장군은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큰아들이 공산 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하자 격노하여 매를 들기도 했다. 큰아들이 사망했을 때 최진동이 공산주의를 반대해서 목숨처럼 아끼던 큰아들을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돌만큼 최진동이 공산당을 싫어했다는 것은 주변에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문화혁명기를 지나며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의 친일이라는 선정적 왜곡이 극심해졌다. 몇몇 연변작가들의 붓끝에 일생을 자기 재산을 다 바쳐 싸운 독립투사가 친일파 매국노로 짓밟히고 매도당한 것이다.  2021년까지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연구한 학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설사 그가 친일파라고 해도 그 변절의 배경을 확인해보는 게 연구자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최진동 장군을 외면했고,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의 업적과 활동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  

2022년에야 최진동 장군의 삶과 친일논란을 정면으로 다룬 논문을 장우순 박사가 처음으로 발표했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가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최진동’ 혹은 ‘최명록’을 검색하면 ‘최명록’이 258건, ‘최진동’이 240건의 관련 자료가 나온다. 대한민국의 무장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많은 양의 자료다. 

보훈처의 공훈록에 최진동 장군의 생몰 연도조차 잘못 기재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틀린 기록이 보훈처의 공식 기록으로 등재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보훈처 공훈록에는 최진동 장군이 1882년 7월 17일 출생, 1945년 6월 18일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진동 장군의 실제 생몰연도는 1883년 7월 17일 출생, 1941년 11월 25일 사망이다. 이렇게 기초적인 자료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고, 공훈록의  업적 설명도 오류 투성이다.  

봉오동 독립전쟁과 최진동 장군에 대한 연구 부족이 그동안 그를 친일파라고 쉽게 낙인찍는 무책임의 근거가 되었다. 그가 만약 정말 친일했다면 일제가 그 증거를 충분히 남겼을 것이다. 그는 일본군을 궤멸시킨 거물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다. 일제가 그의 변절을 선전하고 이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회유와 변절의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밀정에 관한 자료가 계속 발굴되어 다큐가 방송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생각보다 많은 밀정이 있었고 치밀하게 관리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우리가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다수 포함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최진동은 일제 외무성 자료나 신문기사 등 대부분의 사료에도 “불령선인의 수괴, 최진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 이후 한중수교를 맺은 1992년까지 한국 역사학자들은 중국 사료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교 이후 새롭게 파악된 사료들이 많다. 우리 독립운동사, 특히 만주무장투쟁사는 수정보완하는 게 마땅하나 놀랍게도 우리 사학계는 그 당연한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최진동 '친일논란'도 그 부작용의 한 측면이다. 

대한민국 군대가 일본 군대를 격파한 것은 우연이나 행운으로 쉬이 얻을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의 영웅으로 과대포장되는 사이 독립전쟁에 헌신한 주역들과 함께 했던 수천 독립군의 삶, 그리고 무장독립 군사기지 봉오동의 역사가 사라졌다. 필력이 역사적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역사에 말을 보태는 사람은 감정적 접근과 아전인수적 역사 해석을 경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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