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 순국 78주기 추모식 소식을 전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순국일은 한여름인 7월 5일이다. 뜨거운 여름 장마가 한창일 때 추모식을 여는 탓에 해마다 추모식을 준비하며 가장 노심초사하는 부분이 날씨다. 올해도 며칠간 하늘이 뚫린 듯이 비가 내려 장마 속 장대비를 뚫고 오시는 분이 얼마나 될지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추모식 당일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더니 햇빛이 뜨거웠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뜨거운 햇볕과 무더위도 만만치 않다.

최운산 장군의 78주기 추모식이 거행된 국립현충원 현충관 전경
최운산 장군의 78주기 추모식이 거행된 국립현충원 현충관 전경

2016년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출범 후 2017년 7월 5일 인사동 관훈클럽 세미나실에서 첫 추모식을 개최했고, 2018년부터는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제대로된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 평생 북간도에서 무장투쟁에 앞장서신 분,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온 일생을 사셨던 최운산 장군의 삶을 기리는 추모식이니 호국 영령을 기리는 국립현충원이 적합하고 의미 있는 장소다.

국민의례 중인 참석자들 
국민의례 중인 참석자들 
국군의장대의 추모 예포 발사 
국군의장대의 추모 예포 발사 
2023년 최운산 장군 순국 78주기 추모식 참석자 단체사진  

 

최운산 장군 추모식 참석자들이 최운산 장군께 드리는 헌화 
최운산 장군 추모식 참석자들이 최운산 장군께 드리는 헌화 

매년 추모식을 개최하면서 이제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초기엔 최운산 장군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많았다. 봉오동전투는 헐벗고 굶주린 독립군의 기적적인 승리로 이해하던 때라 독립전쟁이라는 표현도 낯설어 했다. 북간도 무장투쟁사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연구가 거의 없어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마저 있었다.

그러나 관련 학술세미나를 꾸준히 개최하고 해마다 봉오동 전투현장을 답사하면서 북간도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이 서서히 역사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만주 지역 무장투쟁사는 그저 파르티잔들의 애국심과 눈물겨운 헌신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지난 7년 간은 이런 피상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이 북간도 독립운동사를 왜곡한 측면이 크다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제대로된 무장투쟁사를 찾아가는 시간이었다.

봉오동 남산에서 참호를  발견하고 기념촬영

역사학자들과 함께 봉오동을 찾아 그동안 전적지로 알려졌던 봉오저수지가 아니라 그곳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상촌지역이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현장'임을 확인했다. 상촌을 둘러싼 여러 산의 산등성이에서 최운산 장군과 독립군이 파놓은 참호들도 발견했다. 또한 대한군무도독부의 본부가 있던 중촌 지역에 1915년에 조성한 연병장과 막사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정말 놀라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아무도 100년 전의 전투현장이 그대로 남아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2018년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사들이 봉오동 답사를 함께 했다.
2018년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사들이 봉오동 답사 중 봉오동전투의 현장인 상촌의 연병장에서 기념촬영 했다

이런 증거들이 역사계를 흔들었고 변화를 이끌고 있다. 봉오동 독립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왜 봉오동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진행되었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역사학자를 비롯해 북간도 무장투쟁사에 관심이 많았던 분들은 후손들 덕분에 그동안의 의문이 제대로 풀렸다고 고마움을 전하기도 한다.

2016년 10월 봉오동을 찾은 우리 5남매와 역사학자들

간도 항일무장투쟁사를 다시 쓰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우리 형제들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최운산 장군의 삶에 감사하는 분들이 기념사업회에 참여해 힘을 보태주시지만 아직 회원이 몇십 명에 불과하고 남의 사무실을 빌려 쓰는 작은 단체라 본격적인 사업 추진이 더디다.

사실 그동안 기념사업회가 추진한 사업비의 대부분을 우리 오남매가 나눠서 부담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형제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함께 마음을 모을 수가 있고, 독수리 5형제라고 불리며 봉오동에도 같이 가는 등 꾸준히 여러 활동을 하고 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큰오빠가 올해 추모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70대 중반을 넘기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7년 전 이 일을 시작할 때 이미 정년퇴직을 한 상태였지만 형제들이 대체로 건강하게 지냈던 터라 큰오빠의 첫 결석에 위기감이 커졌다. 언제까지 손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을 할 수 있을지, 나는 얼마나 더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연변박물관 최운산 장군 사진 앞에서 맏손자 최윤주(왼)와 둘째 손자 최흥주(오른)
연변박물관 최운산 장군 사진 앞에서 맏손자 최윤주(왼)와 둘째 손자 최흥주(오른)

 

학술연구로 봉오동 독립전쟁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고, 몇 차례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을 찾았을 뿐 이제 시작이다. 더 늙기 전에 영화로, 소설로, 애니메이션으로... 다양한 방식의 역사컨텐츠화 작업을 본격화해야 하는데 예산 문제로 마음속에 담아두고만 있다.

1949년생 큰오빠는 전쟁 전 평양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할머니와 부모님 등에 업혀 남으로 내려왔고,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부산에서 성장했다. 피난민 수용소에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산으로 돈을 벌러 떠나면 할머니와 큰오빠는 거제도에 남아 기다려야 했다. 서너살 어린애였지만 부모님과의 이별이 참 슬펐다고 기억하는 큰오빠가 일흔 중반을 넘기며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70년이 지났다  .  

부산에 살 때(1958년) 할머니 김성녀 여사와 엄마 품에  안겨 색동옷 입은 아기가 필자인 최성주, 앞 줄에 왼쪽이 둘째 오빠  최흥주, 가운데가 큰오빠 최윤주 (오른족은 당시 집안일을 도와주던  분)
부산에 살 때(1958년) 할머니 김성녀 여사와 엄마 품에  안겨 색동옷 입은 아기가 필자인 최성주, 앞 줄에 왼쪽이 둘째 오빠  최흥주, 가운데가 큰오빠 최윤주 (오른족은 당시 집안일을 도와주던  분)

 

2018년 73주기 추모식에서 감사인사를 하는 큰오빠 최윤주

2018년 처음으로 현충원 현충관에서 최운산 장군 추모식을 개최할 때 큰오빠는 흥분과 설렘을 가슴에 담은 감사인사를 했다. 장손인 자신이 부족해 이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부담감과 어쩌면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아버지 최운산장군과 봉오동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가족사를 통해 DNA에 새겨진 역사적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었노라고, 이제라도 최운산 장군과 북간도의 역사를 밝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다짐했었다. 우리 오남매 모두의 마음이었다. 

'최운산 장군과 북간도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 재조명'을 위한 역사적 소명을 더 이상 외면하거나 뒷걸음칠 수 없는 우리 후손들은 매번 감동과 기꺼운 응답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 살아있는 동안 기꺼이 마주해야 할 역사이자 사명이다. 

 

편집 :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김동호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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