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Hierapolis-Pamukkale)는 터키 남서부 데니즐리주에 있다. 이 두 곳은1988년 유네스코 복합유산에 등재되었다. 튀르키예에서 유네스코 복합유산에 등재된 곳은 카파도키아의 괴레메와 이곳 뿐이다. 

멋진 자연경관을 가진 파묵칼레와 고대 유적지 히에라폴리스는 튀르키예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꼭 거쳐야 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먼저 우리는 히에라폴리스에 갔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는 히에라와 폴리스가 합쳐진 이름이다. 히에라는 그리스어 '히에론'(성전)에서 나온 말이다. '성스러운 도시'란 말이다. 

히에라폴리스 지역은 철기 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은 있지만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문명의 흔적은 기원전 7세기, 프리기아 왕국의 어머니 신을 숭배하기 위한 사원에서 찾을 수 있다.     

히에라폴리스를 신전에서 정착지로 바꾼 사람은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 셀레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 (BC 223~187 재위)다. 그는 그리스 스타일인 직각으로 교차하는 격자형 구조를 가진 도시를 건설했다. 기원전 188년, 페르가몬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가, 기원전 133년 로마의 지배로 넘어간 후 히에라폴리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온천에 치유력이 있다는 소문에 따라 많은 환자가 방문하는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이 지역은 지진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서기 17년과 60년에 일어난 두 번의 대지진은 도시를 거의 다 파괴했다. 로마 제국은 재정을 지원하여 로마 스타일로 재건했다. 현재 발굴되는 유적의 상당 부분이 이때 지은 것이다.  

서기 215년, 카라칼라 황제는 히에라폴리스를 방문하면서 이 도시에게 '네오코로스'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 칭호로 히에라폴리스는 황제가 인정하는 특권 도시가 되었다. 그 후 약 100,000명이 거주할 정도로 번성했다. 돈도 흘러 들어와서 공공건물, 사원, 콜로네이드 거리, 분수 등을 지었다. 또한 로마 제국 동부에서 예술, 철학,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동로마 시대인 4세기, 또 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시의 많은 건물이 무너졌다. 하지만 폐허 위에 작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는 못하지만 계속 번성했고, 여전히 기독교의 중요 장소의 역할을 했다.   

7세기 초 페르시아 군대가 먼저 휩쓸고 가면서 황폐해졌고, 지진이 또 일어나 황폐해졌지만 작은 주택들이 고대 건물의 폐허 위에 세워졌고, 대성당 대신 작은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히에라폴리스는 작은 규모의 도시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다. 

이후 셀주크 튀르크, 십자군 군대가 점령했다가, 오스만의 통치 아래 들어갔지만, 1354년 치명적인 대지진이 일어난다. 고대 도시 유적들은 모두 무너졌고 그 위로 석회암층이 두껍게 쌓여 도시의 흔적은 사라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무렵 발굴이 시작되어 고대 도시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많은 고대 건물이 발굴되었고 조심스럽게 복원되었다. 현재까지도 발굴과 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많은 유물은 런던, 베를린, 로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지역 고고학 박물관(Hierapolis Arkeoloji Müzesi)에도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고고학 박물관도 가보고 싶다.  

히에라폴리스 간단 지도. 파란 동그라미 길이 프론티누스 거리, 위에 큰 동그리미가 공동묘지.  그 아래 목욕탕이었던 교회, 프론티우스 문, 빈 동그라미는 아고라가 있던 자리, 그리고 원형극장 등  
히에라폴리스 간단 지도. 파란 동그라미 길이 프론티누스 거리, 위에 큰 동그리미가 공동묘지.  그 아래 목욕탕이었던 교회, 프론티우스 문, 빈 동그라미는 아고라가 있던 자리, 그리고 원형극장 등  

프론티누스 거리(Frontinus Street)

프론티누스 거리는 히에라폴리스 남쪽에 있는 짐나지움에서 북쪽 묘지까지 이어지는 히에라폴리스 메인 거리다. 서기 86년 로마 속주 총독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Sextus Julius Frontinus)가 지었다. 그는 총독이면서 로마 시대 저명한 토목공학자였다. 총길이 1,500m에, 넓이는 최대 14m로 일직선으로 난 거리였다. 양쪽에 아케이드가 있었고 아케이드 안에는 상점이 있었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도시는 양쪽으로 나뉘었고, 중심 거리와 수직으로 만나는 작은 거리들이 있었다. 작은 거리들은 규칙적인 격자형 구조로 지었다. 중심 거리를 따라 수많은 공공건물과 분수가 있었고 양쪽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콜로네이드가 쭉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이 거리를 '콜로네이드 거리'(Colonnade Street)라고도 부른다. 

프론티누스 거리
프론티누스 거리

재현된 프론티누스 거리 그림이다. 콜로네이드가 늘어선 아케이드가 참으로 멋지다.   

원래 모습 재현 그림(출처 : 히에라폴리스 안내판)
원래 모습 재현 그림(출처 : 히에라폴리스 안내판)

프론티누스 문(Frontinus Gate)

아치 통로 3개를 가진 이 문은 양쪽에 원통형 탑이 있다. 이 역시 프론티누스가 지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시기에 지어졌기에 '도미티아누스의 문'이라고도 부른다. 비록 상당 부분 무너졌지만 아름다운 모습이다. 꼭 로마의 개선문을 연상케 한다. 원통형 탑은 많이 무너졌는데 아치 통로는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프론티누스 문(Frontinus Gate)
프론티누스 문(Frontinus Gate)
프론티누스 문(Frontinus Gate)
원래 모습 재현그림(출처 : 히에라폴리스 안내판)
원래 모습 재현 그림(출처 : 히에라폴리스 안내판)

공중화장실(Latrines)

프론티누스 문 바로 옆에 있는 공중화장실은 서기 1세기 말 지어졌다. 프론티누스의 문처럼 프론티누스가 설계했을 것으로 본다. 프론티누스는 장군이며 총독이었지만 위에 쓴 것처럼 그는 토목공학자다. 또 하나가 있다. 그는 수로 전문가였다. 두 개의 수로를 통해 깨끗한 물이 화장실로 흘러 들어가게 했고, 폐수는 프론티누스 거리 밑으로 흐르는 관으로 가게 했다. 건물 벽면에 좌석이 장착된 흔적이 있다. 화장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기능을 잃고 저장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중 화장실
공중 화장실

아래 재현한 그림을 보면 화장실에 문이 없다. 열린 공간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 임의로운 일이었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저리 볼일을 볼 수는 없는 일. 고대 사람들은 먹고 싸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보지 않았나 싶다. 삶과 죽음이 일직선상에 놓인 하나이니, 먹고 싸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았으니 죽는 것이고, 먹었으니 싸는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곳곳에 널린 죽음을 일상으로 여기듯... 싸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싶다. 사실 인생도 장처럼 구불구불하지만, 결국 마지막은 힘없이 놓아 버리는 길이다. 그나저나 저 화장실... 남녀 구분은 되었을까? 여자는 아예 출입을 금한 것은 아닐까? 지난번 지하도시 데린쿠유에 가서도 화장실이 궁금했었는데... 나는 화장실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원래 모습 재현 그림(출처 : 히에라폴리스 안내판)
원래 모습 재현 그림(출처 : 히에라폴리스 안내판)

공동묘지에 있는 목욕탕/교회( Baths/Church at the Necropolis)

서기 3세기 초, 공중목욕탕은 석회암 블록으로 지어졌다. 욕조 바닥에는 난방이 되어 있었고, 물은 수로 시스템으로 공급되었다고 한다. 서기 5세기 무렵 목욕탕은 교회로 개조되었으나 나중에 지진으로 거의 다 무너졌다. 아치문만이 꿋꿋하게 남아있다

아고라(The Agora)

기원전 1세기에 지어진 아고라는 묘지 근처에 있었지만, 지진으로 거의 사라졌다. 서기 2세기 프론티누스 거리와 히에라폴리스 동쪽 언덕 사이 넓은 지역에 다시 세워졌다. 170 x 280m의 매우 큰 광장이었다. 하지만 서기 4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여기서 나온 돌들은 도시 주변 방어벽을 확장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고라 광장의 일부로  보존하고 있는 돌 
아고라 광장의 일부로  보존하고 있는 돌 

 공동묘지 (Necropolis) 

히에라폴리스에서 가장 신기했던 곳이 바로 공동묘지였다. 그리스와 로마는 도시 가까이에 공동묘지를 두었다. 공동묘지는 성문에서 시작되는 거리를 따라 성벽 밖에 길게 있었다. 삶과 죽음이 같은 거리를 따라 놓인 것이다. 

히에라폴리스에는 북부 묘지와 남부 묘지가 있다. 북부 묘지는 1,200개 이상 무덤이 확인되었고  300개 이상 묘비 비문이 해석되었다. 북부 묘지는 현재 튀르키예 지역에서 가장 큰 고대 묘지 중 하나라고 한다.

프론티누스 문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2km에 걸쳐 있는 이 묘지는 기원전 2세기~기원후 3세기에 지어졌다. 묘지에는 히에라폴리스 주민과 치료를 위해 온천에 온 환자가 사망하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묻히다 보니 묘지는 정말 각양각색이다 . 

이 무덤은 좀 고급스럽게 지은 집 같은 무덤이다. 지붕과 문이 있는 아주 작은 사원을 닮은 무덤으로 가족 무덤이라고 한다. 

받침대 위에 석관을 올려놓았다. 아마도 고인을 높이 올려놓고 싶었나 보다. 

여기도 받침대 위에 석관을 올려 놓았는데 여기는 관 위에 지붕을 얹었다.

꼭 우리나라 무덤 같다. 그리스 시대 고분으로 둥근 석축 위에 흙이 둥글게 덮인 지붕을 얹고 풀을 심었다. 문으로 들어가면 뭐가 보일까? 좁은 복도가 이어진다고 한다.  

고인돌 형태의 무덤이다. 관은 땅 속에 있을까?

남부 묘지는 가 보지 못했다. 남부는 북부 묘지보다 규모가 작다.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파괴되어 발굴된 무덤이 많지 않다. 단순한 직사각형 흙무덤 형태가 주로 발굴되고 있지만, 내부가 색채 벽화로 장식된 돌지붕 무덤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 어떤 무덤이 나올지는 더 기다려봐야 할 듯….

* 네오코러스(Neokoros)란 황제에게 신전을 바쳤거나 황실의 숭배를 확립했다는 칭호를 부여받은 도시(위키백과).

히에라폴리스의 로마 원형극장과 파묵칼레는 다음 편에... 

참고 사이트 : 다음 백과. 위키 백과 
참고 사이트 : 유네스코와 유산 : 히에라폴리스와 파묵칼레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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