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

셀수스 도서관은 '티베리우스 줄리어스 셀수스 폴레마에누스(Tiberius Julius Celsus Polemaeanus)'를 위한 도서관이다.  셀수스는 서기 2세기 로마의 소아시아 총독이었다. 그가 죽은 후 책을 사랑했던 아버지를 위해 그의 아들 아퀼라(Tiberius Julius Aquila Polemaeanus)가 서기 110년 건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서기 135년 후손들이 완성했다. 셀수스는 도서관 지하실 대리석 석관에 고이 모셔 놓았다.  

셀수스 도서관 정면  

도서관 정면 외관은 2층이다. 각 층은 각각 4쌍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1층 기둥 사이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다. 1층과 2층에는 창문 3개씩 있어 열람실을 비추고 있다. 내부에는 10.90~16.70m의 큰 열람실이 하나 있었다. 약 12,000개 양피지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00개라고 하는 자료도 있다. 

도서관 평면도와 재현 그림(에페소 셀수스 안내판) 
도서관 평면도와 재현 그림(에페소 셀수스 안내판) 

고대에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도서관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40만, 전성기에는 70만 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 두루마리는 지금 160권의 책과 맞먹는다고 하니 최대 1억 천이백만 권의 책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서기 270년 무렵 불타 없어졌다.

다음으로 영향력 있던 도서관은 '페르가몬(=버가모) 도서관'이다. 에페소스에서 북서쪽으로 더 올라가서 에게해 근처에 있던 그리스 도시국가 페르가몬은 이집트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자 양피지를 발명했다. 기원전 197년에 지어진 페르가몬 도서관은 양피지 20만 개의 두루마리를 보유했다고 한다. 페르가몬 도서관도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3번째로 큰 도서관이 셀수스 도서관이다. 셀수스 도서관의 열람실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정면 외관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400년경부터 더 이상 도서관 구실을 하지 못했다. 앞뜰은 수영장으로 바뀌었고 정면 외관은 장식 역할만 하게 되었다.

에페소를 방문하는 대다수 여행객은 셀수스 도서관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을 것이다. 그만큼 어떤 건축물보다도 탁월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꿋꿋하다.  외관의 기둥과 각종 부조 또한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2층 부조
2층 부조
1층 부조
1층 부조
기둥과 열람실 사이  통로 부조
기둥과 열람실 사이  통로 부조

도서관 외관은 발굴 중 발견된 조각으로 복원되었다. 이 조각들 중 일부는 이스탄불과 비엔나에 있는 박물관으로 갔기 때문에 없는 부분은 사본으로 대체되었다. 사본 중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다. Four Virtues 동상이다. 원본은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발굴하면서 가져갔다고 하는데... 에페소에 있는.것은 사본 티가 너무 난다. 돌려주면 좋겠다. 

 Four Virtues 동상 
Four Virtues 동상 

시계 방향으로 용기(bravery)를 상징하는 아레테(Arete) 여신, 지혜(wisdom)를 상징하는 소피아(Sophia) 여신, 그리고 목이 잘린... 지식(knowledge)을 상징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 여신, 사고(thought)를 상징하는 엔노이아(Ennoia)여신 동상이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다.

마제우스와 미스리다테스의 문(Gate of Mazeus and Mythridates)

셀수스 도서관 옆에 붙어 있는 문이 있다. 이 문도 매우 아름답다.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서기 14년)에게 헌정한 문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두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에베소에서 로마 제국 재산을 관리하는 장교로 일하게 했다.

셀수스 도서관과 붙은 마제우스와 미스리다테스의 문
셀수스 도서관과 붙은 마제우스와 미스리다테스의 문

문은 세 개의 아치 통로를 가진 개선문 형태다. 셀수스 방향 아치 부분은 검은 대리석이다. 하지만 반대쪽은 전부 흰 대리석이다. 가운데 문은 양쪽 문에 비해 쏙 들어가게 설계했다. 서로 다른 깊이를 주는 구조가 세련되면서도 색다르다. 

엔타블레이처와 다락방
엔타블레이처와 다락방

문 위에는 엔타블레이처와 다락방이 있다. 엔타블레이처 부분에서 아키트레이브는 단순하고, 프리즈는 담쟁이덩굴로 장식되었고, 코니스는 톱니 모양을 지닌 처마 형태로 장식되어 있다. 다락방 몸통에는 비문이 있으며 지붕도 톱니 모양으로 섬세하게 장식했다. 이 문으로 나가면 테트라고노스 아고라가 나온다. 

마제우스와 미스리다테스의 문(사진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cient_Ephesus_Gate_of_Mazeus_and_Mithridates_-_2014.10_-_panoramio.jpg)
마제우스와 미스리다테스의 문(사진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cient_Ephesus_Gate_of_Mazeus_and_Mithridates_-_2014.10_-_panoramio.jpg)

고대 로마는 귀족과 평민과 노예가 있는 신분제 사회다.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는 해방 노예다. 해방 노예란 주인에게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사람을 말한다. 왜 황제는 이 두 사람을 해방시켰을까? 

노예 대부분은 전쟁포로 출신이었다. 그 당시 사병들은 전문 군인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 활동을 하다 차출되어 전쟁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이 포로가 되면 시장에 팔려나가 노예가 되었다.

로마 노예 대부분은 농업에 투입되었지만 이들 중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가진 노예들은 각자 가진 능력을 발휘하는 자리에서 일했다. 도자기 기술자, 교사, 의사, 약사, 통역관, 행정업무 처리자 등...  이들 중 일부는 해방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는 제국 초기였기에 행정관리자들의 수요가 많았다. 그는 해방 노예를 제국 관리자로 활용했다. 이렇게 해방 노예들은 전문가의 길을 걸었고, 로마 제국 관료조직의 핵심이 되었다. 이런 인재 활용 전략이 로마제국이 1,400여년 동안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테트라고노스 아고라(The Tetragonos Agora )

큰 시장이 있는 상업 아고라다.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현재 크기의 반으로 지어졌다. 이오니아식 서쪽 문 조각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 처음으로 사각형 모양을 갖추면서 확장되었고, 로마 카라칼라 황제가 콜로네이드가 둘러싼 상점 거리와 광장으로 발전시켰다. 콜로네이드는 원래 화강암으로 지었지만 후에 대리석으로 대체되었다.

남아있는 콜로네이드 
남아있는 콜로네이드 

이 광장은 정사각형 모양이다. Tetragonos Agora는 영어로 Square Market이란 뜻이다. 111x111m의 면적에 가운데 넓은 마당이 있었고 4면에는 주로 상점으로 사용된 방이 100여개 있었다. 상점 앞에는 천장을 놓아 보행자 통로를 만들었다.

아고라 지도(사진 출처 : https://www.ephesus.co/ephesus-map.html)
아고라 지도(사진 출처 : https://www.ephesus.co/ephesus-map.html)

에페소에는 Agora가 두 개 있다. State Agora와 Tetragonos Agora다. State Agora는 공공 목적이나 토론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Tetragonos Agora는 상업적 장소로 사용되었다. 테트라고노스 아고라에는 정문이 3개 있다. 위 지도에서 초록 동그라미다. 항구를 향한 하버 로드와 만나는 북쪽 문과, 남동쪽, 서쪽 문이 있었다. 현재는 남동쪽 문만 잘 보존되어 있다.  바로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다. 

테트라고노스 아고라

테트라고노스 아고라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무역 시장 중 하나였다. 항구를 통해 전역에서 상품이 들어오는 쇼핑과 무역의 중심지로, 에베소에 부가 흘러들어오게 했다. 노예 시장도 운영되었는데 고대 도시 중  두 번째로 큰 노예 시장이었다고 한다. 해안선이 서쪽으로 7km나 옮겨 가면서 항구도 이동했다. 점차 무역 시장도 쇠퇴했다. 

테트라고노스 아고라

대극장(Great Theatre)

대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인 리시마코스 통치 기간인 기원전 250년경에 처음 지어졌다. 그 당시 극장은 1층 관중석에 오케스트라와 단순한 1층 무대가 있었다. 서기 40년경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부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황제의 변형과 보수를 거쳐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3단 관중석에 3층 무대를 가진 지금의 거대한 대극장이 되었다.

대극장(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reat_Theatre,_Ephesus.jpg)
대극장(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reat_Theatre,_Ephesus.jpg)

대극장은 경사가 좀 있는 산 중턱에 세워졌다. 관중석의 폭은 145m, 깊이는 30m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극장이다. 최대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개의 가로 통로가 있어 수평으로 3단으로 나뉜다. 맨 아래 1단은 세로로 11구역으로 나뉜다. 가운데와 3단은 세로로 22개 구역으로 나뉘어 전체 55구획이다. 가로 통로에는 관중석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8개 있었다. 입구는 산에서 동굴을 파서 만들었다

무대와 오케스트라 자리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R.IZ.Selcuk_Ephesus_2011-10-04_Theatre-of-Ephesus_242.jpg)
무대와 오케스트라 자리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R.IZ.Selcuk_Ephesus_2011-10-04_Theatre-of-Ephesus_242.jpg)

오케스트라의 폭은 25.8m이고, 3층 무대의 폭은 40m, 높이는 25m다. 무대는 신과 황제의 기둥과 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무대 중앙에 제단도 있었다. 제단은 축젯날 희생물을 바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주로 연극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검투사 경기도 했다. 성 바울이 이교도를 앞에 두고 설교했다고 하여 기독교 성지 방문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대극장(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_Great_Theatre_in_Ephesus,_Turkey.jpg)
대극장(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_Great_Theatre_in_Ephesus,_Turkey.jpg)

이 극장에는 수로도 있었다. 서기 2세기 초 트라야누스 분수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맨 위 좌석에 물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대극장은 359년~366년 지진으로 입구 동굴이 파괴되었다. 이후 수리가 이루어졌지만, 상부 관중석은 버려졌다. 서기 8세기 극장은 에베소를 방어하는 요새의 일부가 되었다. 1970년대와 1990년대에 동굴이 발굴되어 복원되었고 현재도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헬레니즘 분수대(Hellenistic Fountain House)

이 분수대 양식과 구조가 이오니아식이라서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3세기~2세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분수대는 대극장과 가까이 있다.

헬레니즘 분수대(Hellenistic Fountian)

두 기둥 사이에  분수대는 극장 앞 뜰을 향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분수대다. 

재현된 분수대 그림 
재현된 분수대 그림 

대리석 도로(Marble Road)

대리석 도로는 서기 1세기에 지어졌고 5세기에 재건되었다. 항구에서 에베소로 들어오는 주요 도로였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아고라를 지나 대극장까지 이어지는 길로, 이 도로 양쪽에는 로마 콜로네이드가 남아있다. 콜로네이드에는 중요한 사람들의 흉상과 동상이 세워졌다. 황제의 편지는 대리석 바닥에 새겨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홍등가 광고로 추정되는 그림도 있다. 광고에는 발 그림과 화살표와 여성의 머리와 하트 모양이 있다. 이 발보다 작은 사람을 오지 말 것이고 화살표를 따라오면 여성과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광고라고 한다. 항구와 가까우니 외로운 뱃사람들이 득시글했을 듯...

대리석 도로
대리석 도로

눈에 띄어서 찍은 이 조각품은 무엇일까? 오른쪽 표시가 병원을 나타낸다고도 하는데, 그럼, 석상 인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학과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일까? 양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목동들을 위한 신 같기도 하고….

병원 안내(?) 석조물
병원 안내(?) 석조물

이밖에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하드리아누스 사원 위쪽으로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다. 히에라폴리스처럼 열린 수세식 화장실이다. 로마 귀족들의 옷차림이 너풀너풀 길면서도 갈라졌기 때문에 엉덩이를 보이지 않고 앉을 수 있어서 열린 공간도 수용하지 않았나 싶다. 화장실 앞에 분수대도 있었다고 한다. 볼일 보면서 구경도 하고 토론도 했다고 하니...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참으로 신기한 로마인들이다. 

잠시지만 2,000년 전 로마인들이 걸었던 길을 걷는 기분은 묘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같은 차원에서 존재한다는데... 그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동시에 만나는 미지의 차원을 잠시 다녀온 기분이라고 하면 과장된 거겠지? 

이스탄불 방문기도 써야하는데... 내년 1월에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동안 튀르키예 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며, 혹시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기 바란다. 소중히 받아 수정하겠다. 

참고 사이트 : 다음 백과, 위키 백과
참고 사이트 : 에페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참고사이트 :https://ancienttheatrearchive.com/theatre/ephesus-modern-selcuk-turkey/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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