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한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해 상부 기관인 육군성에 제출한 ‘간토지방 지진 관계업무 상보’에는 간토대지진이 있고 사흘 뒤인 9월4일 조선인 학살의 참상이 기록돼 있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 누리집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한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해 상부 기관인 육군성에 제출한 ‘간토지방 지진 관계업무 상보’에는 간토대지진이 있고 사흘 뒤인 9월4일 조선인 학살의 참상이 기록돼 있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 누리집

 

100년 전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기록된 일본군 문서가 새로 발견됐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보관 중인 것으로 드러나, 그동안 ‘기록이 없다’며 조선인 학살에 보이던 애매한 입장을 더는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

마이니치신문은 25일(온라인에선 14일 공개)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사료실에서 간토대지진 때인 1923년 11월 육군성이 실시한 실태조사의 일부 자료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사이타마현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한 구마가야 연대구 사령부가 작성해 그해 12월15일 상부 기관인 육군성에 제출한 ‘간토지방 지진 관계업무 상보’에는 대지진이 있고 사흘 뒤인 9월4일의 참상이 기록돼 있었다.

조선인 학살은 경찰관들이 보호한 조선인 200여명을 사이타마현 우라와에서 후카야·혼조 경찰서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낮에 이동하지 못한 조선인 40여명이 밤이 되자 구마가야 시내 곳곳에서 “살기를 띤 군중에 의해 모두 살해됐다”고 적혀 있다.

 

문서에는 이 사건을 ‘선인 학살’, ‘불미스러운 일’, ‘불법 행위’로 표현하는 등 일본군도 조선인 학살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조선인 습격은 없었다. 방화도 없었다. 독을 (우물에) 넣었다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기술돼 있었다. 학살의 원인 중 하나인 유언비어가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히 한 셈이다.

문서는 육군성 부관(비서실장에 해당)이 1923년 11월2일 지진 재해에 관계된 전 부대를 상대로 실태조사 내용을 같은 달 25일까지 보고하도록 명령을 내려 만들어진 것이다. 구마가야 사령부는 마감 기간을 넘겨 12월15일 자료를 제출했다. 구마가야 사령부의 자료가 남아 있으니 다른 부대의 자료도 어딘가에 보관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시민사회 조사를 보면, 사이타마현에선 223~240여명의 조선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문서를 찾아낸 언론인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신문에 “일본인들은 왜 어떻게 조선인 학살을 감행했는가. (학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이유는 100년이 지나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며 “이 자료 등을 근거해 (학살의) 전모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간토 학살이 있었다는 공문서가 잇따라 발견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마쓰노 히로카즈 당시 관방장관은 간토대지진 100년을 앞둔 8월 말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옮긴 이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한겨레 /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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