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사와 아들 이긍익 부자의 애틋하면서도 달가운 정

"글씨들 사이에서 사람 냄새가 났어요. 240여년 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간 따듯한 정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지난해 11월부터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현판'을 꾸린 정대영 연구사의 말이다.( 2024년 2월 9일(금) <한겨레> 18면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참조) 

2024년 2월 9일자 <한겨레> 노형석의 시사문화재(출처 : 정우열 필진)
2024년 2월 9일자 <한겨레> 노형석의 시사문화재(출처 : 정우열 필진)

2월12일(월)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 

<한겨레>에서 노형석의 위의 이 글을 보고 바로 대구의 제자 현송(玄松, 정인한의원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송, 자네 집에서 국립박물관이 먼가? 지금 그곳에서 조선 현판전 열리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면 전시실 가서 이광사의 글씨 <燃藜室>편액 좀 찍어 보내 줄 수 있겠나?" 

갑작스런 나의 부탁에 현송은 당황스런 어조로 "교수님, 제가 지금 영화 '건국전쟁' 보려고 가는 중인데요. "하면서 "그럼 라원장이 바로 박물관 가까이 있으니 라원장에게 부탁할게요"라 했다.

그뒤 그날 오후 라원장의 전시실 편액 사진이 왔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내가 직접 대구까지 가보지 않고도 이곳에서 볼 수 있으니 참 좋은 세상이다.

사진을 찍어 보내준 라원장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광사의 글씨를 새긴 <연려실> 편액(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이광사의 글씨를 새긴 <연려실> 편액(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여기 <燃藜室> 편액은 조선시대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아들  긍익(肯翊,1736-1806)에게 써준 호(號)를 그 뒤 이긍익이 새겨 서재에 걸었던 겄이다.

그동안 이 편액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관저에서 수습한 뒤 여러 경로를 거쳐  박물관 수장고에 전래되어온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 이자 양명학(陽明學)의 대가로서 '동국진체'(東國眞體; 전통적인 진체/晉體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창안된 옥동체/玉洞體를 말함)를 창안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진경산수'(眞景山水) 화풍과 더불어 당대 조선 특유의 서화예술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장이다. 

허나,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소론 세력이었던 부친 이진검(李眞儉)과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따라 옥사(獄死)하거나 유배(流配)돼 객사하는 비극 속에서 가문이 몰랐해 갔다. 

이에 그는 정계에 나가지 못하고 오직 학문 수행과 글씨에만 몰두했으나 쉰살이 넘은 1755년 자신과 친분이 있던 소론 윤지(尹志, 1688-1755)가 전라도 나주에 영조를 욕하는 낙서를 붙인 사건(나주 벽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연루자로 지목돼 함경도 오지 부령에 유배됐고, 부인은 자결했다. 그 뒤 1762년에 다시 완도 옆 신지도로 이배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한 많은 삶을 마쳤다.

그에게는 긍익(肯翊,1736-1806), 영익(令翊, 1740-1780) 두 아들이 있었다. 온갖 불행을 떠 안은 그에게 두 아들은 유일한 힘과 희망이었다.

동생 영익은 아예 유배지 신지도로 내려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수발하며 함께 서화 작업을 했고, 형 긍익은 서울에서 어린 여동생과 함께 근근이 집안을 지탱해 나가면서 부친과 끊임 없이 편지를 나누고 거처를 방문하면서 부자의 정을 이어 갔다.

그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긍익은 아버지의 유배지 신지도로 바로 내려가 고인의 거처에 아버지가  써준 '燃藜室'을 조각해 작업실에 편액으로 걸고 30년을 불철주야 집필에 몰두해 마침내 저 유명한 사서 <燃藜室起述>(연려실기술)을 완성하게 되었다.

'燃藜室'은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어둠을 밝혀 역사를 연구하는 방'이란 뜻이다.

원래 이 말은 중국 전한 시대 유향(劉向 BC7?-BC6)이란 학자가 밤새 이 명아주나무를 태워 불을 밝히고 역사 연구를 해서 대가가 되었다는 데서 연유된 것으로 이광사가 아들 이긍익에게 유향과 같은 큰 역사 학자가 되라는 뜻에서 써준 것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 첫머리에서 "선군(先君:돌아가신 아버지)으로 부터 '燃藜室'(연려실) 세 글자의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書室)의 벽에 걸어두고 그것을 판에 새기려다가 미처 못했다"고 적었는데 200년 넘게 실물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제 강점 초기 조선총독부가 현재 남산의 관저터에 있던 조선시대 별저와 정자터인 녹천정(鹿川亭)에서 이 편액 실물을 수습한 뒤 여러 경로를 거쳐 박물관 안에 소장된 사실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통해 공개하면서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이 편액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지난해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이 일반 미술품 경매도록에 편액의 이광사 친필 글씨 작품이 나온 것을 보고 구입하면서 이번 국립대구박물관의 전시에서 극적으로 아버지의 글씨와 아들이 만든 편액이 만나게 된 것이다.

전시가 12일까지라 해 이곳 김포에서 먼거리 대구까진 갈 수 없고 해서 제자에게 사진을 부탁한 것이다.

헌데, 라원장은 이 '燃藜室' 편액뿐만 아니라 그밖에 '大安門',, '養德堂', '春坊 ' 등 궁중 현판,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작품들을 사진에 담아 보냈다.

그중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광사의 대자(大字) 행서(行書)와 선조어필 '雍圖過南隣花園 詩'(옹도과남린화원시)였다.

조선시대(1392-1910) 궁궐 현판은 궁궐을 세울 때, 화재나 전쟁 등으로 궁궐을 보수할 때, 다른 궁궐이 건물을 헐어 옮겨 지을 때 제작 수리되어 궁궐 건축에 걸었다.

제작 과정에서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여 이름은 바꾸고 새로운 뜻과 소망을 담기도 하였다. 

올려준 사진중 '大安門' 현판이 바로 그런 예이다.

덕수궁 예전 현판(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덕수궁 예전 현판(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고종(재위 1863-1907)은 나라가 위태하던 1906년 화재로 덕수궁을 수리하면서 본래 걸려 있던 '大安門' 현판을 내리고 지금의 '大漢門'이름으로 바꿔달도록 했다.

'큰 하늘'이란 뜻의 '大漢'에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대한제국의 소망을 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러 왕실은 권위를 상실하였고 다섯 궁궐이 관광지, 오락시설, 박람회장으로 전락 훼손되면서 현판 대다수는 제자리를 잃고 떠돌아야 했다. 건물에서 내려온 현판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이후 이왕가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되었던 창경궁(昌慶宮)의 명정전(明政殿)과 명정전 화랑, 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등에 진열되었다.

해방 이후 1963년에는 624점의 현판이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화랑에 전시되었다. 경복궁에 보관되었던 700점이 넘는 현판은 1982년 창경궁에, 1986년 창덕궁에 보관되다가 1992년 덕수궁에 궁중전시유물관을 개관하면서 옮겨졌고, 이후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다시 이동되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궁중 현판 775점은 조선왕실문화를 담은 소중한 유물로서 의미를 되찾았다. 현판의 종류는 현판을 걸 궁궐 건물의 등급에 따라 '殿', '堂', '閤', '閣', '軒', '樓', '室'로 서로 다르게 불렀다.

또한 현판은 건물 규모와 조화를 고려해 그에 걸맞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자료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는 주로 피나무, 19세기에서 20세기에는 잣나무를 썼다. 형태는 가장자리 테두리를 만들고 구름, 용머리, 봉황머리 모양 등 위계가 달랐다. 길상(吉祥)의 의미를 담은 칠보(七寶)무늬, 연화(蓮花), 육화(六花)무늬가 많이 그려졌다. 그밖에 봉황, 박쥐, 물고기, 과실, 문자 등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었다.

올려준 사진을 보니 국립대구박물관 조선현판전에 전시된 현판들은  주로 왕실 현판들이었다.  그중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이광사의 대자(大字) 행서(行書)와 선조어필 <過南隣花園詩>였다.

이광사의 대자 행서 육유의 시 <산록>(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이광사의 대자 행서 육유의 시 <산록>(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이 행서는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1125-1210)의 시, <山麓>(산록)으로, 빠른 붓놀림과 글씨의 에 깃든 힘으로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감(動感)과 흥취가 뛰어난 작품이다.

草合路如線

초목이 자라서 만들어진 길이 실처럼 휘어져 있다는 뜻으로, 산속의 작은 길이 실처럼 휘어져 있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偶隨樵子行

가끔은 나뭇꾼의 행동을 따라가며 걷는다는 뜻으로, 가끔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서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林間遇磐石

산속에서 바위를 만난다는 뜻으로, 산속이나 숲속에서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나 장애요소를 만날 때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小憩看春耕

잠시 쉬어가며 봄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상한다는 뜻으로, 잠시 쉬어가며 주변의 경치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상하는 행위를 나타내었다.

이로써 '산록'은 산속의 작은 길을 따라가며 가끔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며 숲속에서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고, 잠시 쉬어가며 봄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경험과 그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선조어필, 옹도의 시 <남린화원을 지나며>(雍圖過南隣花園詩) 현판(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선조어필, 옹도의 시 <남린화원을 지나며>(雍圖過南隣花園詩) 현판(출처 : 라영걸 원장 제공)

이 현판은 선조가 중국 당나라 시인 옹도(雍圖, 805-?)의 시, <남린의 화원을 지나며>를 새긴 것이다. 이 시는 봄이 빠르게 지나감을 아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莫怪頻過有酒家

주막에 자주 가는 것을 괴이하다 말라

多情長是惜年華

정이 많아 오래도록 좋은 시절 안타깝네

春風堪賞還堪恨

봄 바람 불어 감상할 만하고
도리어 한스럽기도 하네

纔見花開又花落

겨우 꽃이 피는 것을 보았더니 또 꽃이 지는구나

燃藜室!  명아주 타는 방!

이렇게 나는 설날 명절 마지막 연휴날에 아버지 이광사의 글씨와 아들 이긍익의 편액을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의 달가운 정!

뜻밖에 육유와 옹도의 시를 읊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스승과 제자의 정 아니겠는가?!  ㅎㅎㅎ

정원장, 라원장 고맙네!
그리고 사랑해! 淸福을 누리시게!

2024. 2. 29.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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