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brandt 그림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년)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도 꼽힌다. 특히 그는 동판화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큰 업적을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약 300점의 동판화 작품을 남겼으며, 이 동판화만으로도 그는 세계 미술 사상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 동판화 왼쪽이 "칼을 지닌 동양권력자로서의 자화상"(1634년 작), "문지방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1639년 작) /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0%98%EB%B8%8C%EB%9E%80%ED%8A%B8)
▲ 동판화 왼쪽이 "칼을 지닌 동양권력자로서의 자화상"(1634년 작), "문지방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1639년 작) /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0%98%EB%B8%8C%EB%9E%80%ED%8A%B8)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 위 그림은 동판화로 제작한 자화상이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과 시간이 필요했을까?

22세에 그린  'Rembrandt Laughing'

▲ '웃는 자화상' 1628년 작
▲ '웃는 자화상' 1628년 작

렘브란트는 19세인 1625년에 독립 화실을 냈다. 그 당시 그 나이에 아주 드문 경우였다. 1628년 22세에 그린 이 자화상은 아주 즐거워보인다. 얼굴에 생동감이 있어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준다. 그 당시 제자들도 두었다니 아주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26세에 그린 'The Abduction of Europa'

1632년 그린 'The Abduction of Europa'는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신화보다는 '갈릴레아 호수의 폭풍', '돌아온 탕자' 등 성경 장면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 'The Abduction of Europa'  1632년 작
▲ 'The Abduction of Europa'  1632년 작

사람들은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라 부른다. 위 그림에서 보면 어두운 화폭 속에 몇몇 대상만이 빛을 받아 강렬하다. 오른쪽 나무 덤불은 불길하게 어둡고, 나무 뒤의 하늘 또한 비바람이 몰아치듯 컴컴하다. 하지만 반대편 하늘은 분홍과 파랑으로 덮여있고, 햇빛은 구름을 뚫고 물에 반사되어 바다는 반짝반짝 빛난다. 이렇게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26세에 일명 ‘렘브란트의 빛’을 자유자재로 그려내기 시작해서 이후 숱한 명작을 남겼다.  

55세에 그린 'Saint Bartholomew'

성 바르톨로메오는 예수의 십이사도 중 한 명이다. 선교 활동 중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 성 바르톨로메오의 초상' 1661년 작
'▲ 성 바르톨로메오의 초상' 1661년 작

렘브란트가 죽기 8년 전인 1661년 제작된 이 그림에서 성 바르톨로메오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성 바르톨로메오가 칼로 겪은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렘브란트는 성 바르톨로메오를 일반인처럼 그렸다. 우울하게도 보이고 초연하게도 보이는 성 바르톨로메오는 거룩하다기보다는 평범한 이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아주 곤궁했다. 세월의 고난을 가득 안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에서 자기 모습을 투영하지 않았을까?

1633년 부유한 귀족 사촌과 결혼한 렘브란트는 아주 잘 나간다. 워낙 실력이 출중했기에 화가로서 명성도 얻고 큰돈도 벌어 10년간 흥청망청 써댄다. 하지만 1642년 아내가 죽은 후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치면서 50세인 1656년 파산 한다. 1663년 자신을 돌보던 여인도 죽고, 1668년 하나 남은 아들도 죽은 후 그 이듬해인 1669년,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다고도 하고 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구미술관에서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전이 2023.10.31~ 2024.3.17까지 열려, 렘브란트 판화 120점이 전시되고 있다. 동판 위에 가는 송곳으로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작업한 렘브란트의 고독하고 섬세한 세계를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의 그림

27세에 그린 '루이즈 앙투와네트의 초상(Portrait of Louise-Antoinette Feuarden)'

프랑스 화가인 밀레는 '씨 뿌리는 사람', '추수하는 사람들',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등 농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초상화도 그렸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 루이즈 앙투와네트의 초상, 1841년 작 
▲ 루이즈 앙투와네트의 초상, 1841년 작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친구 아내 '루이즈 앙투와네트'다. 이 초상화는 그가 이후에 그린 그림과 아주 다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눈은 당당하다. 서로 팔을 감싸안은 자세는 절제 있어 보인다. 옷은 단정하고 엄격하다. 칼뱅주의가 생각나는, 마치 청교도적 삶을 사는 새색시 같아 보인다.

60세에 그린 '노르망디 그레빌의 젖 짜는 여인(Laitière Normande à Gréville)'

이 작품도 'LACMA GUEST MASTERPIECE'라고 표기해 놓았으니, LACMA에서 원정 나온 작품이다. LACMA 명작을 2점이나 보았다. 운이 좋다.

▲ Laitière Normande à Gréville,1874년 작
▲ Laitière Normande à Gréville,1874년 작

'노르망디 그레빌의 젖 짜는 여인(Laitière Normande Gréville)'은 밀레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 아직 다 완성된 그림은 아니라고 한다. 밀레는 노르망디에서 성공한 농민의 아들이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를 마친 후 1849년에 시골,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25년 동안 농민을 그렸다. 그는 농민에게 깊은 연민이 있었기에 농민의 고단하고 겸손한 일상을 그렸다. 그로 인해 '사회주의 혁명가'라는 오해까지 받았다.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그는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살았다. 

이 그림은 농민과 풍경을 동시에 주제로 삼았던 여러 그림과 다르다. 그림의 주인공은 오로지 여인이다. 뒤 풍경과 맑은 하늘은 배경일 뿐이다. 흰 블라우스에 회색 치마를 입고, 우유 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한쪽 팔을 허리에 올리고 있는 그녀는 씩씩해 보인다. 얼굴은 분명치 않지만, 똑바로 들고 있다. 힘 있고 자신있어 보인다. 상당수 밀레의 그림들은 농민이 얼굴을 숙이고 있거나 뒷모습을 보이거나, 얼굴을 그리더라도 이목구비가 선명치 않게 그렸는데…. 밀레가 말년에는 좀 더 당당하게, 대담하게 농민을 대변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 밀레의 양털 깎는 사람(1857-61), 닭 모이 주는 여인(1846-1848)/ 2019년 시카고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얼굴이 선명치 않게 그린 농부들이다. 
▲ 밀레의 양털 깎는 사람(1857-61), 닭 모이 주는 여인(1846-1848)/ 2019년 시카고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얼굴이 선명치 않게 그린 농민들이다. 

'Franz Xaver Winterhalte'의 '공주 레오닐라의 초상화(Portrait of Leonilla, Princess of Sayn-Wittgenstein-Sayn)'

독일 출신의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는 유럽 왕족과 귀족 초상화를 그려 명성을 얻은 화가다, '시녀에 둘러싸인 외제니 황후의 초상',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 등으로 유명하다. 

▲당시 유럽 왕실 최고의 미녀라 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 1865년 빈터할터 작(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lisabeth_of_Austria,_by_Franz_Xaver_Winterhalter.jpg)
▲당시 유럽 왕실 최고의 미녀라 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 1865년 빈터할터 작(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lisabeth_of_Austria,_by_Franz_Xaver_Winterhalter.jpg)

드라마 <황후 엘리자베트> 시즌 1을 보고, 이후 그녀의 삶이 어땠을까 검색하다가 이 초상화를 만났다. 세상에나~~ 그녀도 아름답지만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게티에서 바로 그 '빈터할터'의 작품을 만나다니…. 너무나 아름다워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 섰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보고 또 보았다.

▲ Portrait of Leonilla, Princess of Sayn-Wittgenstein-Sayn, 1843년 작
▲ Portrait of Leonilla, Princess of Sayn-Wittgenstein-Sayn, 1843년 작

아름다운 그녀 레오닐라는 독일 귀족에게 시집온 러시아 공주다. 이 그림은 분위기가 이국적이어서 처음엔 오스만 제국 공주가 앉아 있는 줄 알았다. 야자수가 있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양 기둥은 붉은 커튼을 둘렀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레오닐라는 고혹적이다. 분홍 리본 장식을 단 흰 드레스와 어깨에 걸친 보라색 망토와 함께 펼쳐진 의상은 우아하다. 고운 목선에 비스듬히 늘어진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그녀는 좀 지루한 듯 무심해 보인다.  

▲  '공주 레오닐라의 초상화(Portrait of Leonilla, Princess of Sayn-Wittgenstein-Sayn) 1849년 작((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eonilla_Bariatinskaya#/media/File:Leonilla_Ivanovna_Baryatinskaya.jpg)
▲  '공주 레오닐라의 초상화(Portrait of Leonilla, Princess of Sayn-Wittgenstein-Sayn) 1849년 작((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eonilla_Bariatinskaya#/media/File:Leonilla_Ivanovna_Baryatinskaya.jpg)

여기서도 레오닐라 공주는 전형적인 유럽 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양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레오닐라 공주는 뛰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도 그녀는 새침하다. 억지 모델로 끌려나온 듯....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매력이 독특했는지 빈터할터는 그녀 초상화를 여럿 그렸다. 그중 게티 센터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3편에 계속

참고 기사 : 거장 렘브란트 동판화를 만난다…대구미술관 특별전 31일 개막
참고 사이트 : 위키백과, 다음백과 
참고사이트 : https://www.getty.edu/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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