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금고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어린 시절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모양과 찬란한 색깔의 금고를 간직하고 있다. 나는 자라면서 나의 금고를 털린 적이 별로 없다. 어린 시절 누이의 꾐에 넘어가 딱 한 번 털린 적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털린 적이 없다. 사람들은 자기 금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 금고가 들키기를 원치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금고에는 관심이 많다.

이런 현상은 결혼한 부부에게서 특히 많이 발생한다. 결혼한 부부 중에도 남편보다는 아내들이 배우자의 금고를 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아내들은 남편의 금고를 터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랬는데도 남편의 금고가 털리지 않을 경우 엄청 바가지를 긁는다. 이렇게 되면 매일 매일의 부부싸움은 따 놓은 당상이다. 반면 이상하게도 남편들은 아내의 금고를 터는데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내와 남편의 상반된 현상을 과연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자들은 수시로 상사들에게 자신의 금고를 강탈당한다. 법으로 호소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당장 직장에서 잘릴 판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부하직원들은 상사들에게 금고를 털린다. 이것은 거의 강탈 수준이다. 그리하여 금고를 털린 부하직원들끼리 소주를 마시며 못된 상사를 안주삼아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상사에게 금고를 털리지 않는 편이었다. 상사가 나의 금고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흔치 않지만 종종 발견되곤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금고를 사수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게 잘하고 있는 짓인지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를테면 수업시간에 선생이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앉은 순서대로 질문을 하다가도 내 차례가 되기 전에 선생은 이상한 심리적 저항을 받는다. 그리하여 나에게까지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상사에게 금고를 털리지 않는 비법도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비법은 그리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사에게 금고를 많이 털린 부하직원 중에 상사의 눈에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처럼 금고를 안 털리는 부하직원들이 상사의 눈에 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상사에게 거리감을 두고 있는데 어느 상사가 고과점수를 잘 주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 방식의 삶을 선택해왔다. '출세가 중요하냐? 아니면 네 금고를 지키는 게 중요하냐? ' 하는 질문을 누가 한다면 나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그깟 출세보다는 내 금고를 지키는 게 훨씬 낫다고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의 금고라는 게 그렇게나 대단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마치 목숨이라도 되는 냥 나의 금고를 사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심창식 주주통신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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