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人忘處超三界     나(我)와 너(人)를 잊은 자리는 삼계를 초월하여
大悟眞空證法身     진공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법신을 증득하였으니
無影樹頭花爛漫     그림자 없는 나무가지마다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고
靑山依舊劫前春     청산은 여전히 겁전의 봄이로구나

봉은사 영각(출처 : 정우열)
봉은사 영각(출처 : 정우열)

삼성동 봉은사(奉恩寺) 영각(影閣)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 게송이다. 영각(影閣)은 사찰을 창건, 또는 중건하거나 그 사찰에 머물면서 수행한 고승(高僧)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사찰 안의 건물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조사당(祖師堂), 또는 조사전(祖師殿), 국사전(國師殿)이 있다. 여기 조사당 또는 조사전은 그 사찰에 종파를 연 조사가 있어서 그분의 영정을 모신 곳이고, 국사전(國師殿)은 그 사찰에서 국사가 배출 돼 국사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봉은사 영각은 법당 오른쪽 층계를 올라 영산전(靈山殿) 왼쪽에 있다.

이 영각에는 불단에 지장삼존불상과 탱화가 있고, 벽면으로는 봉은사 개산조(開山祖: 하나의 파를 처음 이룬 스님)인 연회국사(緣會國師)를 비롯한 조선 불교의 중흥조 보우(普雨) 대선사와 서산(西山), 남호 영기(南湖 永奇) 율사, 그리고 영암, 석우 스님 등 7분 스님의 진영(眞影)이 모셔저 있으며, 오른 쪽 벽면으로는 6.25 전쟁 전후 희생된 201위 호국 영가의 영단이 설치되어 있다.

위의 주련은 바로 그 영각 네 기둥에 붙어 있는 글의 내용이다.

이 주련은 소백두타(小白頭陀)라고 칭송을 받았던 진호석연(震湖錫淵)스님이 엮은 <석문의범 - 대예참례>(釋門儀範-大禮懺禮) 가운데 29번째 '여러 조사에게 청례하고 공양을 올리는 예문' 가운데 찬탄으로 나오는 게송(偈頌)이다.

게송이란 불교에서 불타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한시 형식의 노래이다.

그럼, 이 게송이 무슨 뜻인지 알아 보자!

我人忘處超三界(출처 : 정우열)
我人忘處超三界(출처 : 정우열)

첫째, 我人忘處超三界

여기 '我人'은 '나'(我)와 '너'(人)를 말한 것이고, '忘處'는 '잊은 곳'이란 뜻이다. 또 '超三界'는 과거, 현재, 미래 3세를 뛰어 넘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게송은 너와 나라는 분별망상(分別妄想)의 집착을 끊어 삼계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뛰어넘으란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 이 사바세계는 벗어나야 할 대상이지 결코 안주할 대상이 아니다.

大悟眞空證法身(출처 : 정우열)
大悟眞空證法身(출처 : 정우열)

둘째, 大悟眞空證法身

여기 '大悟'는 번뇌를 벗어나서 크게 깨닫는다는 뜻이고, '眞空'은 '진여실성'(眞如實性)으로 모든 매혹한 생각을 여윈 상태, 곧 열반(涅槃)을 말한다.  다음 '法身'은 '자성신'(自性身) 또는 '진실신'(眞實身)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증득(證得)하신 청정(淸淨)한 마음의 상태를 몸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신(法身)은 '法界眞如'(법계진여)의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게송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크게 깨달아 법신(法身)을 증득(證得)하라는 말이다.

無影樹頭花爛漫(출처 : 정우열)
無影樹頭花爛漫(출처 : 정우열)

셋째, 無影樹頭花爛漫

여기 '無影樹頭'는 '그림자 없는 나무'란 뜻으로 '나와 너'(我人)가 사라진 경지를 가리킨다. 곧 마음의 경지를 말한 것으로 옛 선사(禪師)들이 일찍이 즐겨 사용했던 표현이다. '無影塔'도 같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유가(儒家)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격조 높고 고아한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無絃琴'(줄 없는 거문고)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림자 없는 나무!
줄 없는 거문고!

靑山依舊劫前春(출처 : 정우열)
靑山依舊劫前春(출처 : 정우열)

넷째, 靑山依舊劫前春

여기서 '靑山'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산이다. '푸르다'는 의미의 '靑'은 살아 있음을 뜻한다. 산은 언제나 요지부동하므로 곧 마음자리를 말한다. 온갖 세파에 흔들려 번뇌가 켜켜이 쌓이고 망상이 집을 짓더라도 우리의 마음 자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또 '劫前春'에서 '劫前'은 '劫外'와 같은 표현으로 단순하게 보면 태어나기 이전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우주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시간의 개념을 '成住壞滅'(성주괴멸)이라고 하여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멸겁(滅劫)으로 나누는데 이러한 네겁을 벗어난 초연한 경지를 말한 것을 '劫外'라 한다. 시간의 한계를 벗어난 몸이므로 상대의 차별을 넘어선 무차별의 세계를 말함이다. 마음은 겁밖의 자리이므로 이는 '常住不滅'(상주불멸) 하는 별천지이기에 '春'(봄)이라 했다.
바로 '常春'(늘봄)이다. 이를 노래로 나타내면 '劫外歌'(겁외가)가 되고 이를 다시 선(禪)에 비유하면 '劫外禪'(겁외선)이 된다.

요즘 봉은사 홍매가 한창이라 홍매를 찾는 탐매객이 많다. 홍매는 영각 서쪽 추녀 끝에 있다. 만일 봉은사 홍매 보러 가시거던 홍매만 보지 말고 영각의 주련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오늘은 봉은사 영각 주련을 다시 읽으며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2024. 3. 22.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늙은이가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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