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계모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에 개가해 왔다. 그때 생모는 몹쓸 병이 들어 수년 째 가사를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계모가 들어왔을 때 생모는 거동을 못할 지경이어서 행랑채 골방에 누워 지내기만 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계모와 더불어 가사를 전담했다.

나는 철이 들어서는 생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생모에 대한 유일한 추억은 내가 네 살쯤 되었을까? 까마득한 옛날이어서 그 무렵의 다른 기억은 없지만, 그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다. 초여름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읍내 외가에 있던 생모는 남산 기슭에 있는 산사로 나를 데리고 갔다. 절 입구에 맑은 샘이 있었다. 막 떠오른 태양은 은총인 양, 축복인 양 샘물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아롱거렸다. 요즘으로 말하면 현란한 무도회의 장면 같다고 할까? 아니면 어지럽게 돌아가는 사물놀이와 같다고 할까? 아무튼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들이 어우러져 약동하는 것 같은 광경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생모 또한 세상사에 초연한 모습으로 그윽이 샘물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어딘가 처연한 구석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는 비교적 건강했던 것 같다. 진부한 말 같지만, 그날 아침 하얀 소복을 한 어머니는 어린 내 눈에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우리는 샘가 풀밭에 보자기를 깔고 앉았다. 산록의 아침공기는 상쾌했고, 삽상한 바람은 풀밭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아늑한 기분에 젖어있을 때, “애야. 배고프지?” 하시더니 어머니는 가져온 작은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고향 해변에서 채취한 돌김에 말은 투박한 김밥이었다. 우리 모자는 난생처음 그렇게 다정하게 앉아서 김밥을 먹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 먹어본 첫 김밥이었다. 김밥에 뭘 넣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김밥은 달콤했다. 어머니는 나에게만 부지런히 김밥을 먹여주고 자기는 별로 먹지 않았다. 김밥을 다 먹고 나서 나를 다시 샘가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백옥 같은 손바닥에 샘물을 떠서 나에게 먹여주었다. 여름철인데도 가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신선하고 시원한 물맛이었다. 그 이후 내가 언제 그와 같이 상큼한 물맛을 맛볼 수 있었던가, 기억이 없다. 생모는 그러니까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밥의 추억을 선사하고 떠났다.

그밖에 생모에 대한 애틋한 추억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에게 모성애는 그것이 전부였다.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부터 생모의 병환이 깊어져서 자식들을 전혀 돌볼 수 없었다. 그러고 어머니는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표류하다 영영 헤어나지 못했다. 내가 불우한 아이로 자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생모의 빈자리를 할머니가 대신 메워주었고, 그로부터 5년 후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 봄에 우리 삼남매는 계모의 손에 맡겨졌다. 어린 나로서는 계모의 성품이나 개성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계모 본인 또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지 할머니나 아이들에게나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우리 집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모가 안방에서 “00야”하고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왜 그러나했더니 계모는 뜻하지 않게 나에게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를 가르쳐주었다. 장남인 나와 가까워지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것 만이었다면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계모는 표독한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계모는 미모에서나, 교양에서나, 여성다운 품성에서나 생모의 발뒤꿈치에도 못 미친다고 친척들은 수군덕거렸다. 그런 말을 듣고 본처에 대한 열등의식이 솟구친 계모는 본처자식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였고, 시골에서는 웬만큼 사는 중농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방과 후 귀가하면 점심이 없었다. 할머니가 가끔 차려주기는 했지만, 출타했을 때는 굶기가 십상이었다. 계모에게 배가 고프다고 하소연하면 “요새 점심 먹는 애가 어디 있냐?”고 하면서 일축했다. 그래도 밥 달라고 울상을 지으면 “저놈새끼가 애미 말을 뭘로 듣는 거냐?” 하면서 부지깽이로 때릴 듯이 을러댔다. 그러면서도 이복형제들에게는 간식을 챙겨주었다. 콩쥐팥쥐전이 생각났다. 그럴 때 내 어린 가슴에는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삭막하고 설한풍이 부는 환경에서도 눈물겨운 한 토막의 추억이 있다. 그 따스한 한때를 회상할 때면 멍든 가슴에도 한 줄기 훈훈한 훈풍이 분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운동회 때였다. 계모는 할머니와 함께 그 전날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했다. 나를 비롯해 두 동생이 3학년과 1학년이었다. 이복동생 둘은 아직 미취학아동이었지만 운동회를 구경하러왔다. 따뜻한 가을날이었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얼굴에 모처럼 웃음을 머금은 시골사람들이 운동장 가득 모여들었다. 흥겨운 잔칫날 같은 분위기가 학교 주위를 감돌았다. 그날따라 계모도 온화한 얼굴이었다. 늘 찡그리기만 하던 험악한 얼굴만 보다가 온정이 도는 얼굴을 보니 얼었던 나의 마음도 스르르 눈 녹듯 풀렸다.

나는 100m달리기에서 우리 조 일등을 하여 상품으로 공책과 연필을 탔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가족은 화단 옆 벚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와 계모가 돗자리에 펼쳐놓은 음식을 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먹음직스러운 김밥이 첫눈에 들어왔고, 동이감 홍시, 찐밤, 조기구이, 삶은 꼬막, 백설기, 쑥떡이며 송편, 더덕무침, 삶은 달걀이며 계란말이 등이 풍성한 먹을거리를 이루었다. 계모가 우리 집에 들어온 이후 야외에서 우리 가족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생모가 살아있을 때는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거동을 못하는 본처를 빼놓고 다른 식구들끼리 희희낙락하는 장면을 허용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아버지에게 없었기 때문이리라. 언제 이승을 하직할지 모르는 본처에 대한 지아비의 심원한 연민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나에게 “너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구나.”하고 웃으셨다. 계모는 김밥덩어리를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 우리 형제들에게 골고루 나눠먹였다. 달리기를 하여 배가 고팠던지 김밥은 꿀맛이었고, 볶은 깨를 많이 넣은 김밥은 고소했다.

나는 상품으로 탄 공책과 연필을 이복동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너희들도 앞으로 운동회 때 형처럼 일등을 해야 해.”하고 말했다.

“그럴게요. 성님, 엄마가 준 김밥 먹어서 힘이 더 나지? 오후에는 계주가 있죠. 거기서도 일등을 하면 좋겠는데.” 이복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또 상품 타면 너희들 다 주라고? 그래 다 주마. 다음에 입학하면 공부 잘 하라고.”

나는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럴 때 어머니는 애정 어린 눈으로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은 친형제건 이복형제건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모처럼 친목회라고 할까, 그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이 모두가 가을운동회 덕분이었다. 이 운동회를 주관한 교감선생은 아버지였다. 교사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멀리 보였는데, 늘 수심에 찼던 그 얼굴이 그날은 밝은 표정이었다. 화단의 코스모스도 산들바람에 정겨운 미소를 띠며 우리 식구의 화해를 축하해주었다.

2016.1.5

*본 글은 올 4월에 개최한 김가네김밥문학상 수필부분 입선작입니다.

사진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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