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잡지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선친께서는 매년 여름과 겨울 도청소재지의 교육청 강습을 마치고 돌아오시다가 그 당시 『소년세계』라는 어린이잡지를 사다주셨다. 그전에는 시골 벽촌의 초등학생이 언감생심 어린이잡지를 대할 기회가 없었고, 그런 잡지가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 잡지에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전설과 괴기담이 있었고, 동요와 동시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가슴 설레게 하는 동화가 있었다. 내가 『소년세계』에서 맨 처음 읽었던 동요는 윤석중의 「둥근달」이었다.

 

보름달 둥근달 동산 위로 떠올라

어둡던 마을이 대낮처럼 환해요

초가집 지붕에 새하얀 박꽃이

활짝들 피어서 달구경하지요.

 

일제강점기에 『윤석중동요집』(1932)에 실렸던 「우산」이며 「산바람 강바람」등은 교과서에 들어있으므로 아이들이 흥얼거리고 다녔지만, 「둥근달」은 『소년세계』를 보지 않은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내가 신이 나서 그 동요를 읊조리면 아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나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아이들 중 몇몇은 그 잡지를 보여 달라고 떼를 썼다. 나는 동무들에게 그 어린이잡지를 보여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 동요는 가정환경 때문에 어두운 내 마음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는 듯했다.

내가 초등학교일 때 생모는 몹쓸 병에 걸려 하루 종일 골방에 누워계셨다. 어머님의 얼굴은 지붕위의 박꽃처럼 하얬다. 어쩌다 나를 보아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할뿐 가까이 다가와서 껴안아줄 수도 없을 만큼 쇠약했다. 그럴 때 어린 내 마음도 무엇으로 메울 수 없는 허허로움에 몸부림쳤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생모는 드디어 짧은 일생을 마쳤으니 나는 모성애를 누릴 겨를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엄마가 싸준 도시락이며 엄마가 지어준 옷을 자랑할 때면 나는 언제나 풀이 죽어 동무들과 외따로 떨어졌다. 그럴 때 나는 아버지가 사다주신 『소년세계』를 읽었다. 그것은 나의 울적한 심사를 잠시나마 달래주었다. 이를테면 「둥근달」을 거듭거듭 읊으며 돌아가신 어머님의 잔영을 회상하자면, 어느새 어머님의 얼굴이 허공에 떠올라 일찍이 내가 본적이 없는 밝고 살뜰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기뻐 허공에 대고 외쳤다. ‘엄마,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그러나 그것은 금방 사라지는 환영이었다. 아쉬움에 나는 다시 몸부림치곤 했다.

생모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우리 집에 개가해온 계모는 성정이 사나웠다. 방과 후 숙제를 하려고 막 책상에 앉아 책을 펴놓고 있으면 “야, 저 건너 개땅쇠네 집에 가서 식칼과 낫을 빌려오너라.”하고 소리쳤다. 개땅쇠네 부모는 우리 집에 가끔 품팔이하러왔다. 그런데 왜 하필 식칼과 낫 같은 살벌한 물건들을 나를 시켜 가져오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숙제해야 되는데요. 이따가 갈라요.” 하고 대꾸하면 “너 그라면 저녁밥 못 먹을 줄 알어.”하고 겁을 주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계모에게 당한 서러운 이야기를 다 꺼내놓으면 무엇하겠는가? 나의 애달픈 이야기는 그때 『소년세계』의 「콩쥐팥쥐전」이 대신 해주었다. 내가 아무리 계모의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해지려고 노력해도 계모는 나라는 존재를 헌 막대기 취급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곁에 있는 때에는 나를 위하는 척 하는 계모의 위선이 더욱 가증스러웠다. 그럴수록 나는 동화 속의 어린 동무들에게 하소연했다. 동화속의 동무들도 나를 위로했고, 나 또한 동화 속 주인공 어린이들을 위로했다.

읍내에 있었던 중학교는 본가를 떠나 외가에서 다녔다. 생모가 없는 외가는 불 없는 화로처럼 썰렁했지만, 그래도 계모의 시도 때도 없는 구박과 모멸에서는 해방되어 학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말 당시는 고교입시경쟁이 요즘의 대학입시경쟁과 마찬가지로 지옥이었다. 고교평준화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골 읍내에 무슨 가정교사가 있었겠는가? 입시학원도 없던 시절이었다. 교과서와 참고서가 입시준비를 위한 수단의 모든 것이었다. 시골 중학교에 부임하는 교사의 자질도 도시학교의 유능한 교사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다. 그럴 때 나의 입시 길잡이가 되었던 학생잡지가 『학원』이었다. 거기에는 국내 유수의 고교입시에 출제되었던 문제며 또 예상문제도 함께 실려 있었다. 그것은 고교입시 정보에 목말라했던 나에게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나는 아버지를 졸라서 3학년 1학기부터는 매월 『학원』을 살 돈을 타냈다. 다른 데는 인색했던 아버지도 그것만큼은 승낙했다.

『학원』에는 학생문예란이 있었다. 나는 가끔 거기에 기고하여 창작의욕을 북돋았다. 내 자작시가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어쩌다 선외로 뽑혀 언급된 적은 더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얼마나 기쁨에 떨었고, 순진한 기대감에 고무되었던가! 후일에도 시를 끼적거렸던 자질은 그때부터 길러졌는지 모른다.

여하튼 나는 목표로 했던 최상의 고교입시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차선책으로 선택한 고교에는 입학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우리 고장에서는 한 해에 한두 명 합격할까 말까하는 우수고교였다.

대학시절과 사회인으로서는 일반교양잡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두루두루 읽었다. 첫손에 꼽히는 것은 1960년대의 『사상계』였다. 독립투사였던 장준하 선생이 발행했던 그 잡지는 종합교양지로서 선두를 달렸다. 『사상계』를 들고 다니지 않으면 어디 가서 지식인 행세를 하지 못하는 세태였다고 할까? 그 엄혹했던 독재정권 치하,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한 번도 훼절하지 않고 그처럼 수준 높은 교양지를 발행할 수 있었다니 절로 감탄할 뿐이다. 부정과 불의가 활개 쳤지만, 나날이 심해지는 언론탄압에 눌려 서서히 무디어지는 국민의 저항정신을 일깨우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고 온몸을 던졌던 고결한 정신의 발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장준하 선생은 결국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쓸쓸히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불굴의 투사가 맞아야했던 잔혹한 최후였다. 이 자리에서나마 삼가 명복을 빈다.

1970년대 들어 산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각 신문사마다 월간지와 주간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나의 시사정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종합지는 발 빠르게 시류에 영합하는 데는 능력을 발휘했지만, 황야의 선지자처럼 정의를 외치고,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데는 미흡했다. 종종 몇몇 잡지는 독재자의 입맛에 맞는 편집에 우선함으로써 진실을 파헤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사정을 알리는 데는 외면했다.

나는 차라리 그럴 바엔 순수문학에 심취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70년대 이후 내가 가까이 하기 시작한 문학지가 『현대문학』이었고, 『문학과 지성』이었고, 『창작과 비평』이었다. 요 근년에는 『세계의 문학』도 즐겨 읽었다. 이상문학상을 주관하는 『문학사상』이나 『실천문학』도 가끔 본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세계의 문학』이 작년 겨울호를 끝으로 폐간했다. 그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며 세계문학의 한국화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학의 새로운 이론을 선구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창작과 비평』이 민족.민중주의에 치중했고, 『문학과 지성(문학과 사회)』이 자유.시민주의를 창도했다면, 그것은 전반적인 인문학은 물론 사회학, 철학의 영역에서 기치를 드날렸다. 한때의 친구를 잃었으니 마음이 허전하고 착잡하다. 이렇게 한국문학잡지계의 구조조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면 안 되는데, 하고 나는 어쭙잖게 가슴앓이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가슴 뭉클했던 추억 한토막이 떠오른다. 1998년 여름이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실천문학』 여름호를 소개하는 기사였는데, 정도상 작가가 쓴 「부용산」에 관한 기사가 내 눈에 번쩍 뜨였다. 나는 금세 세월의 강을 건너 한국전쟁 휴전 후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 당시 중학생과 대학생이었던 동네 당숙들과 형님들은 만나기만 하면 너나없이 가곡 「부용산」을 불렀다. 어린 소년이었던 나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들었다.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로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오릿길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언제 들어도 애잔하고 절절하고 호소력이 있는 그 노래는 어린 내 가슴에 여울져 흘렀다. 그 유장한 가락은 또한 한 편의 시였기에 소월의 「초혼(招魂)」에 비길만하였다. 1950년대 한때는 남도지역 빨치산들의 애창곡이라 하여 금지곡이었고, 그런 연유로 1960대부터 ’80년대까지 삼엄했던 시절에는 운동권과 진보지식인들이 뒷골목 술집에서나 숨죽여 불렀던 노래다.

한동안 작사자 작곡자 모두 미상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은 1948년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교사였던 고 박기동 시인이 요절한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에다 같은 학교 음악교사였던 월북 작곡가 안성현이 열여섯 살 애제자의 돌연한 죽음을 애도하여 곡을 붙인 가곡이다. 지금도 나는 안치환이 부르는 그 노래를 들으면 카타르시스의 저 깊은 강물 속으로 하염없이 하염없이 가라앉는다.

어쩌면 민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리는 그 비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져 아름답고 아련한 잔상을 심어주었다. 이제는 전설이 되다시피 한 노래의 현장을 찾아 직접 부용산을 올라갔다는 작가 정도상은 그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무지개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며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고. 그가 에둘러 말하고자 했던 것은 역경 속에서도 고이 간직한, 주인공의 구원한 사랑이었다. 이처럼 사라진 문헌을 샅샅이 찾고,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여 잃어버린 전설이며 설화를 우리 앞에 다시 살려내는 일은 뜻있는 잡지가 해야 할 사명의 하나이다.

어떻든 은퇴한 후로 나는 주로 문학잡지를 보지만 그동안 게을리 했던 과학 잡지며 생태학 잡지도 본다. 뒤늦게나마 편식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것들은 나의 반려이며, 막역한 친구가 된다. 나의 서재에서 그들은 이제 전공서적을 하나 둘씩 밀어내고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가끔 시사문제에서 그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때도 있고, 내가 바라는 방향을 그들이 지향하지 않기도 한다. 젊었을 적에는 내 비위에 거슬리고,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잡지를 매도하기도 하였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그러기를 멈추었다. 내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였고, 어느 덧 더 넓은 교양과 지식과 안목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 잡지들을 보면서 내가 읽어야할 단행본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그런 다음 어떤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직접 구입하여 읽는다.

이제는 내가 그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이 독자를 선도하는 양질의 잡지이고, 어떤 것이 단지 판매부수만을 올리기 위하여 독자를 일시적으로 유혹하는 데만 집중하는 저질의 잡지인지 구분할 수 있는 식견을 갖게 되었으므로, 나는 내 주위에 어떤 잡지들이 출몰하고 범람할지라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잡지마다 추구하는 목적과 대상이 다를지라도 정평 있는 잡지라면, 일시적인 흥미 위주의 잡지가 아니라 독자의 가치관과 주체성을 정립하는데 기여해야 하리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시대가 바뀌어도 건전하고 양식 있는 잡지들이 독서계에 굳건히 정착되기를 바랄뿐이다.

2016년 6월 19일

본글은 한국잡지협회에서 주관한 제9회 전국민잡지읽기 수기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글입니다(편집자 주).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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