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유없는 감정은 없다

인생이 무상(無常)하다고들 하지만 인간관계 또한 그에 못지않게 無常하다. 인생이 일정치 않고 불확실하며 변화에 노출되어 있듯이, 인간관계도 수시로 변하며 친했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직장생활에서의 인간관계라든지 사회에서 만난 인간관계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여 생(生)하기도 하고 멸(滅)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남녀관계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구태의연하기까지 하다. 여자의 변덕스러움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남자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여자들의 그 변덕스러움은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다. 남자들이 그 이유와 목적을 파악하지 못할 뿐이다.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파악하려는 노력조차 소홀한 게 사실이다. 감정에는 논리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양선생과 조선생 사이에 있었던 관계의 경위가 어찌되었든 간에 만약 양선생이 팜므파탈이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면 그거야말로 조선생은 팜무파탈의 역할(?)을 한 셈이 된다. 양선생을 치명적인 위험으로 몰고 간 여인이 되기 때문이다.

밤은 더욱 깊어만 가고, 한번 오해한 사람의 독기는 풀길이 없다. 회원들도 음악회 잘 감상하고 나서 이게 웬 날벼락인가 하고, 표정들이 사납기 그지없다. 썰렁한 분위기에서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마디 오고가고, 다들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누가 봐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박선생과 나는 금고털이 방어 전문가다. 이제 방어 전문가들이 나설 때가 되었다. 박선생과 상의 끝에 며칠 뒤 조선생을 만나보기로 하였다. 카페에서 만난 조선생은 밝고 화사한 의상을 걸치고 나왔다.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 우리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본다. 박선생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진심으로 양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하려는 건 아닌 거죠?"

박선생의 진지한 질문에 조선생이 코웃음을 친다.

"왜요?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박선생과 나의 표정이 굳어지자 조선생이 깔깔 웃는다.

"걱정들 말아요. 명색이 명상센터인데 그렇게 막 나갈 수는 없지요. 양선생님 하는 거 봐서요.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죠."

그러면서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 명상센터에 왔을 때 양선생님을 많이 따랐어요. 박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양선생님이 꼴 보기 싫어졌어요. 나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을 하며 조선생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갑자기 무슨 기억이 떠오른 걸까?

'제가 예전에 기자 시절에 당한 게 있어서 그런가 봐요."

조선생이 과거를 회상하며 우리에게 전한 내용은 좀 충격적이다. 20대 후반 기자시절에 저명한 대학교수를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취재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중앙일간지 여기자를 성추행했다면 요즘으로 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생이 20대 후반인 당시에는 성희롱이 지금만큼 사회적인 이슈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신문사 부장에게 그 교수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자, 부장으로부터 호된 질책만 받았다는 것이다. 처신을 잘못해서 그리 된 게 아니냐며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더라는 것이다. 그 일이 두고두고 조선생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고 한다.

"그 이후로 교수들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어요. 양선생님은 교수출신이라도 다를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예전의 그 교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걸 어쩌겠어요?"

조선생은 그 때 누군가를 붙들고 실컷 울었어야 했다. 취재하러 간 자신을 성추행한 저명한 교수에 대한 분노, 그런 교수를 응징하지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 신문사 부장에게 위로는커녕 처신을 잘못했다며 질책을 받은 억울한 심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분이 풀릴 때까지 울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생은 수치심에 사로잡혀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것이 마음의 병이 된 것이다.

과거의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분을 새기며 살아온 조선생의 일생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조선생의 콧잔등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여기자였지만 속으로는 말 못할 아픔을 지닌 채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명상센터에 들어온 것도 그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양선생님을 볼수록 예전의 그 교수가 생각이 나서 적개심을 갖게 되는 저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어요. 여러분들께 죄송할 따름이에요."

조선생의 눈물어린 고백을 들은 박선생과 나는 조선생을 위로하는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팜므파탈이라는 말 한마디에 치를 떨었다는 조선생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제 공은 양선생에게 넘어갔다. 양선생은 금고털이 전문가다.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할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는 남의 금고를 터는 공격 전문가이지 방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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