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옛길과 새길

실로 팜므파탈의 끝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생이 퇴출당한 후에 양선생도 명상센터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지역사회에서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여기저기 나가던 강연도 안 나간다고 하고, 모든 연락이 끊겼다. 양선생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양선생과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장선생이 소식을 전해왔다. 선배와 박선생이 동석한 자리였다.

"양선생님이 이상하게 변했어요. '진짜 고통 받는 자는 복수를 당한 자가 아니라 복수를 한 자'라는 말이 있던데, 양선생님이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요."

박선생이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리듯이 말을 한다.

"복수한 자는 복수한 것의 두 배 이상으로 자신의 영혼이 상처를 받게 되어 있어요. 양선생은 자신이 과거에 쌓았던 명예도 지키고, 미래의 불투명한 삶도 지키려고 했겠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던 거지요. 세상도 잃고, 영혼도 상하고, 그러니 얼마나 자괴감에 빠졌겠어요."

선배가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 덧붙인다.

“요즘 들어 이런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를테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할 것이며, 내 욕구를 채워가는 길가에서 걸림돌이 되거나 간섭하는 자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사회가 점점 팍팍해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명상센터에서 조차 이런 일이 벌어지니 황당할 따름이네요."

양선생과 조선생이 사라진 명상센터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의 빈자리가 커 보였다. 명상모임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년 후에는 그 모임마저 없어져 버렸다. 양선생이나 조선생이나 승자는 없고 패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어쩌면 둘 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훈련시킬 스파링 파트너로 연습상대가 되어준 것일 수도 있다.

마음을 훈련시키는 스파링 파트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역할(?)을 맡는다. 그 스파링 파트너는 극복의 대상이지 복수의 대상은 아니다. 그 일 이후 명상이라는 것 자체가 시큰둥하게 여겨졌다. 명상을 통해서도 인간은 바뀌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조선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박선생을 통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조선생은 쾌활해 보였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명상센터에는 다들 열심히 나가시죠?"

조선생이 먼저 명상센터부터 챙긴다. 박선생이 힘없이 대답했다.

"웬 걸요. 그 때 그 일 이후로 명상센터 모임이 흐지부지 되어버렸어요."

"그래요? 저런.... 그 때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조선생이 말끝을 흐린다. 조선생이 어떤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걸까?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은 한번 길을 내어 익숙해지면 그 익숙해진 길로 가는 게 편하다고 여기지요. 그 마음길은 어떤 계기나 사건으로 인해 굳어진 것이기도 해요. "

조선생이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제가 양선생님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제가 과거에 입은 상처와 관련이 있지만, 그렇다고 양선생님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 분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었고요."

조선생이 그 일 이후 어떤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 듯하다. 망상의 바다 끝까지 가서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졌다가 살아 돌아온 자의 내면적 깊이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박선생이 조선생에게 친근한 미소를 짓는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자기만의 금고를 끼고 살아요. 금고는 각자가 지닌 내면세계라고 볼 수 있지요. 하늘이 준 선물일 수도 있고요. 자신만의 금고인 내면세계를 잘 지키고 아름답게 가꿔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지요."

그러자 조선생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그러나 마음의 금고 안에는 좋은 생각과 맑은 마음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더러운 욕망과 불결한 감정들이 들어있어요. 분노와 복수심도 들어있고요. 욕망과 복수심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옛 마음길이고, 좋은 생각과 맑은 마음은 새 마음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옛 마음길을 닫고 새로 마음길을 내는 수련을 해야 해요. 그 길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일 수도 있고,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앙드레 지드가 '좁은 문'에서 인용한 성경 문구가 오랜만에 생각이 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박선생이 조선생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

"옛 마음길은 과거의 욕망과 분노를 간직하는 마음이고,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현재와 미래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지도 못하잖아요. 현재를 과거의 흐름에 맡기는 무책임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결국 현재를 초라하게 만들고,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게 되는 거지요."

박선생과 나와 조선생은 의기투합하여 다시 명상센터를 부활하기로 뜻을 모았다. 명상센터의 목적은 마음길을 새로 내는 것이다. 마음길을 새로 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숱한 시도와 마음의 수련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마음길에 평화와 구원이 있다.

<끝>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주주통신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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