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존재의 이유

녀석은 무척이나 나를 사랑하는가보다. 내가 잊을만하면 자기를 어떻게 그리도 쉽게 잊을 수 있냐며 원망이라도 하듯이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는가하면, 몸을 섞고 피를 나눈 혈맹을 잊으면 되겠냐며 계절과는 상관없이 출몰하여 나를 들볶기도 한다. 그런데 왜 적과 동침 하냐고 나를 질책해도 사실 할 말은 없다.

적과의 동침은 나의 의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며, 순전히 적의 의지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바보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적을 거부하지 못하고 적의 의지에 굴복하여 적과 동침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다. 적은 분명코 나의 의지 밖에 있다. 내가 적을 거부한다고 하여 적이 나와의 동침을 포기한 적은 한번 도 없다. 한 마디로 나는 적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렇게도 내가 귀찮다고 불평하고 쫓아내려고 애를 써도 녀석은 들은 척도 안한다. 오히려 내가 자기 전에 소파에 앉아 있을 때, 이따가 잠자리에서 보게 될 나를 미리 선이라도 보는 듯이 내 주위를 얼쩡거리며 맴돌기도 한다. 적은 나를 이렇게도 신중하게 탐색하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그저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만다. 적을 가볍게 여기는 그런 태도들이 아마도 내가 녀석을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녀석이 옮긴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이 1억 5천만 명에서 3억 명 사이로 추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금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인 33억 명이 말라리아 위험지역에 살고 있다. 주로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 등 온난 다습한 열대성 기후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지역들이다. 사람의 피를 빨면서 녀석은 침샘에서 피가 빨리 굳지 못하게 하는 물질을 사람의 피부로 주입하는데, 이때 말라리아, 뇌염 등 질병을 옮기는 것이다.

▲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지카바이러스’는 신생아 소두증을 유발한다. AP 연합뉴스(사진출처 : 한겨레 신문 '모기의 기습' http://h21.hani.co.kr/arti/culture/science/41748.html)

이렇듯 찬란한(?) 전염의 전통과 문화를 지닌 녀석은 내 곁에 머무를 온갖 이유와 명분을 다 갖고 있다. 나의 부부생활을 엿보는 것은 물론이요, 부부관계의 문제점과 해결책에 대해 상담을 해주겠다면서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은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은 내 침대와 침대에 깔려있는 요를 유심히 살펴보며 나의 부부관계가 좋은지 나쁜지 감별하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녀석의 관찰에 따르면 이부자리 가운데가 오목해야 부부관계가 좋다고 할 수 있는데, 나의 이부자리는 가운데가 볼록한 것으로 미루어 부부관계가 그리 좋지 않을 거라고 잘난 체를 해대기도 한다. 여기 저기 다니며 여려 유형의 인간들과 동침하면서 얻은 결론이라면서, 날씨가 더운 탓에 그리 되었을 거라는 나의 해명을 일축해버린다.

냉랭한 부부관계를 자신이 해결한 적도 있다면서 때 아닌 자랑질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한밤중에 출몰하여 잠을 설치게 하면, 부부싸움으로 두어 달이나 말을 섞지 않던 부부도 자기 때문에 도저히 잠을 못자겠다며 불평하면서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피를 자신의 몸 안에서 한데 섞게 하니 간접적으로 부부사이를 연결해주는 결과를 낳은게 아니냐며, 괴상한 논리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가치를 과대포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피를 나눈 혈맹임을 - 사실은 피를 나눈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피를 강탈당한 것이지만 - 앞세워 나를 불순한 외부 세력들로부터 보호해준다는 구실로 자신의 신기술과 신무기를 도입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 신기술을 도입해준 대가로 더 많은 피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 신기술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날개를 이용한 신형 비행술이라고 하는데 가끔 불시에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하여 그런 게 있나 싶기도 하다. 녀석의 비행술이 워낙 뛰어난 탓에 그 기술이 신형인지 구형인지 나로서는 알 턱이 없다.

하지만 그 가당찮은 신기술이라든지 신무기라든지 하는 것이 외부의 불순한 세력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검증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데야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하여 이 모든 게 적의 의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의 박약한 의지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들이라며, 지구를 지키는 경찰이라도 되는 냥 으스대는 녀석의 종족은 그만큼 인간보다 오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보다 지구 생태계에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심창식 주주통신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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