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敵은 늘 내부에 있는 적이 문제다. 일찍이 존 에프 케네디 미국 전 대통령의 동생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도 <내부의 적>이라는 책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국가의 적은 외부에도 있지만 내부의 적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외부에 있는 적은 적인 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적이라고 새롭게 인식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내부에 있는 적은 적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기 때문에 내부의 적에 대해 주의하라는 말이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적은 외부의 적이나 내부의 적만 있는 게 아니다. 나와 동침하고 있는 적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외부의 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고, 그렇다고 내부의 적이라고 하기에는 '내부'라고 생각될 만큼의 '내부'에 있지 않다. 굳이 분류하자면, 틈새 전략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적은 말하자면 외부와 내부의 틈새에 있는 적이다.

이 적은 때로는 위험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대상이다. 따라서 그런 적과 동침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오히려 적과 동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동침의 대상은, 결혼한 경우 배우자이거나 미혼인 경우 사랑하는 애인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과의 동침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란 我와 非我의 투쟁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단재 선생의 관점에 따르면, 국가적으로는 내 나라와 다른 나라들과의 투쟁사가 한국 역사가 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나와 타인들과의 투쟁 - 이 경우 투쟁이라기보다는 관계라든가 갈등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겠지만 - 이 나의 인생 역정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非我라고 하여 모두가 적은 아니다. 국가적인 견지에서의 非我는 우호적인 그륩과 적대적인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기 마련이고, 요즘처럼 국가 간의 관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상황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것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반면에 개인적인 견지에서의 非我는 가깝게 지내고 있으면 지인이고, 모르는 사람들은 타인으로 분류될 수는 있어도, 우호적인 그룹과 적대적인 그룹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국가의 경우와는 구별된다.

투쟁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나의 인생역정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며 여러 형태의 관계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화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투쟁한다고 하는 것은 독재정권에 항거할 때를 제외하고는 굳이 투쟁이라고까지 할 일은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삶은 투쟁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심지어는 침실을 같이 쓰는 배우자와도 화목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으니 결혼생활이라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투쟁의 범주 - 드라마에서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 에 넣는다고 해서 크게 잘못된 분류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인생의 와중에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적과의 동침이 시작된 것이 몇 살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누구와 동침을 하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동침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계속>

편집: 이미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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