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관의 출발은 다양한 시점의 사관

▲ 세미나 진행중인 강연자들

그토록 보고싶던 조국의 광복을 한달여 남기고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잊혀진 독립운동가가 있다. 일제 강점기, 사재를 모두 털어 대한민국 독립군의 기초를 세우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최운산 장군.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11월 4일 창립식을 올린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는 11월 29일 서울 종로구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회관에서 창립기념 학술세미나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 만주지역 독립군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최운산 장군을 비롯한 그의 일가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으로 활약했지만 이제껏 그들의 이름 대신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의 이름만 기억될 뿐이었다는 점을 밝히는 역사적 자료들이 새롭게 조명받았다. 세미나에서 발표된 사료들에서는 독립군의 총사령관은 최운산 장군과 그 형제들이었고, 김좌진, 홍범도 장군은 연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 전투의 주역으로 공훈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또한 최운산 장군이 조직한 항일 독립군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국제적 확산을 막아냈다는 결정적 근거도 함께 제시됐다. 당시 일본 세계정복의 욕망, 그 제국주의 광풍속에서 일본 헌법보다 상위법으로 인정되던 일제 제국국방방위지침조차 어기고 일본군이 간도지방에 화력을 지원한 이유도 우리 독립군의 강력한 국제적 위상때문이었다고 한다.

▲ 세미나를 듣고 있는 사람들

토론자들은 발제 내용에 공감하며 잊힌 최운산 장군을 기억에서 되살리는 방법으로 영화, 소설 등의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다는 대안이 제시되었다. 사재를 출연하고 일가 전체가 독립군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참여한 최운산 장군을 오늘날 우리 국민 기억속에 되살리는 일은 마침 같은날 발표된 국정 역사교과서 문제처럼 획일화되고 정권에 의해 편집된 역사의 편린들을 재구성하는 관점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올바른 역사관을 지켜주는데 매우 중요한 과제로 다가온다. 

독립군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다. 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그는 연길에 거주하다 친형 최진동 장군, 동생 최명순 선생과 함께 1910년 만주 봉오동으로 이주해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로 꼽히는 신한촌을 건설했다. 애국 청년들을 결집해 자위대를 양성한 뒤 1919년 독립군 부대인 군무도독부로 발전시키고 일제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듬해에는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 북로독군부 창설을 주도해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고 나자구 전투, 대황구 전투, 안산리 전투 등에서도 활약했다. 4일을 걸어도 그 땅을 다 지나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가산을 정리해 무장부대 창설과 활동에 자금을 댔고, 일제 정보 당국의 전화선을 총알로 끊고 통신을 두절시켜 작전을 무산시키는 등 사격과 첩보전에도 능했다는 사실을 전해들고 세미나에 참석한 최운산 장군의 후손들은 잠시 감회에 젖기도 했다. 

세미나 토론자로 참여한 고려대학교 최호근 교수는 "이 자리가 이어지고, 앞으로 20~30대 젊은이들의 참여도 늘어나면 충분히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라고 기념사업회의 활동을 평가하며, "조급해 하지 않고, 우선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씩 모으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운산 장군의 업적 재조명과 같이 이제 첫 걸음을 뗀 '올바른 역사 인식의 방법론'이 전 국민의 마음을 얻기를 기대해본다. 역사를 단 하나의 기록으로 인식하는건 위험하다. jtbc가 있어야 했듯이, 한겨레도 있어야 하고 조선일보도 있어야 한다. 그 해석과 판단은 온전히 역사에, 후손들에게 맡겨야 한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맞춰 비전문가들이 급조한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는 사라져야한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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