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내 부모님의 고향은 두만강 건너 봉오동과 훈춘이다. 역사적 격변을 겪으며 20대에 고향을 떠난 부모님은 실향민이란 이름으로 평생을 사셨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명절이면 일가친척이 모여 시끌벅적한 이웃집들이 늘 부러웠다. 부산 사투리를 심하게 쓰지 않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늘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봉오동’이라고 답하곤 했다.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봉오동전투를 아느냐고 되묻곤 했었다.

▲ 최운산 장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승전의 역사인 봉오동전투가 벌어졌던 곳, 그 북간도의 봉오동은 바로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우리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이 독립군부대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와 통합부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시고 할아버지 삼형제가 수천 명의 무장독립투사들과 힘을 합쳐 항일 독립전쟁을 치러낸 근거지였다. 나는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이 최초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크게 이긴 전쟁’이라는 이야기와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에 이어서 10월에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가 함께 치렀던 여러 번의 전투를 청산리전투라고 부른다고 설명을 덧붙이곤 했다.

가끔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장군이 사령관이고, 김좌진장군이 청산리전투의 사령관이라고 하던데? 하고 묻는 사람에겐 나는 좀 더 긴 설명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가 치러낸 전쟁이었고 그 통합부대의 총사령관은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이다. 간도 제일의 거부였던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초기의 군자금 일체를 자비로 감당하셨다. 최운산 장군은 몇 천 명에 달하는 통합부대의 식량과 군복, 무기 공급 등 일체의 군자금을 지원했고, 첩보와 군사작전으로 전투를 직접 지휘한 참모장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그 휘하의 연대장인데 총사령관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김좌진 장군도 <대한북로독군부>의 연대장이었다. 청산리전투는 북로군정서의 개별적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에 이어진 독립군 통합부대가 치러냈던 여러 번의 전투로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었다. 북로군정서도 통합부대의 일부였다. 간도의 독립운동사가 잘못 정리되어 있다. 북로군정서도, 군사연성소도 최운산장군이 자신의 땅을 주둔지로 내어주고 군자금을 투입해 창립했다. 등등....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언젠가 역사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밝혀 주기를 기다렸다. 해방 후 중국과 수교가 없었던 기간이 길었고, 개인이 사료에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전문가들의 합리적 의심과 분석이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찾아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번 휘어진 역사기록이 다시 바로 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1919년 3.1운동 당시 국내뿐 아니라 연변에서도 3월13일 용정과 3월26일 왕청현 백초구를 비롯해 연변 각지에서 독립선언 시위가 크게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3.26의 왕청현 백초구의 시위는 당시 왕청현의 유지였던 최운산장군 형제들이 수천 명의 시위대를 조직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학계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한 연변 동포의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만큼 연변지역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무장독립전쟁의 요새가 될 수 있는 인적 물적 배경이 튼튼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일반적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우국지사나 독립군들이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면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게릴라처럼 숨어 살았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이라는 우국충정 하나로 목숨을 걸고 그 모든 것을 견뎌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 독립군의 편제가 후방부대를 두고 의무부대와 보급부대를 따로 편성할 만큼 대규모였다는 것을 모른다. 소련을 통해 1차 대전을 치르고 돌아가는 체코군의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했고, 대포, 기관총, 장총, 수류탄, 권총 등 일본군에 필적할 우수한 무기를 소유했다는 것을 모른다.

이런 오해가 만주 독립운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불타는 애국심이 밥이 되고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전문가들은 합리적 추론 위에 좀 더 구체적인 근거를 찾아내지 않았을까? 몇 천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주변에 함께 모인 이유가 무엇인지, 훈련하고 생활하는 것을 넘어 완전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낼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무장독립전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그 당시 간도지역의 사회상이나 생활수준은 어땠는지 모든 것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주인이 떠나버린 봉오동전투와 간도에서의 항일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이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의 과장과 왜곡에 묻혀버렸다는 것을, 더구나 그 왜곡 위에 전문가의 해석이 보태어지고 역사적 가설이 학문적 권위에 힘입어 이미 정설로 굳어져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에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소수 생존자의 왜곡된 증언이 이미 역사적 사실이 되고 권위가 되어있는 것이다.

중국과 수교가 없었던 긴 기간, 학계에서도 자료가 부족했던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는 아직도 미개척 분야이다. 중국에서는 지주였다는 이유로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이었다고 폄하 당하고, 한국에서도 제대로 정리되고 알려지지 못한 채 외면 받았다. 기록하는 자의 몫이 되어버린 만주무장독립운동사에 역사적 진실의 새 옷을 입혀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첫걸음을 내디딘다.

이제라도 그 일을 우리 세대에서 시작해야 하겠다. 독립운동가 최운산장군의 일생을 찾아 기록하고, 이미 휘어져버린 역사적 오류와 대면해야겠다. 아직은 아무 것도 주어진 것이 없지만 한걸음씩 걷다 보면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다. 우리 형제들과,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 답을 찾게 될 것이다.

<계속>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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