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와 인연이 깊은 인왕산

선바위 위로 특이한 바위들이 잇달아 보인다. 오늘 우리들은 선바위를 뒤로 하고 얕은 계곡 건너 송림을 지나 해골바위로 올라갔다. 성곽 가까이에 어미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의 「모자바위」가 있는데, 두꺼비를 닮았다고 하여 「두꺼비바위」라고도 한다. 성곽탐방로는 머지않아 곡장(曲墻)에 이른다. 곡장 바로 아래 곡장을 등지고 「부처님바위」가 있다. 그 바위는 얼굴바위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가부좌로 앉아 좌선하는 모습과 같다. 이래저래 인왕산은 불교와 관계가 깊은 산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연산군 때까지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산 이름도 인왕산이라고 했다. 지금도 대소 여러 채의 불사(佛寺)가 산자락과 중턱에 모여 있다. 조선 초기 한때는 서산(西山) 또는 서봉(西峰)으로 부르다가 기록상으로는 세종 때부터 인왕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신(仁王神)을 말하는데,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 하여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거나 나형(裸形)으로 주먹으로 치려고 하는 분노의 상도 있다. 일제는 어느 때부터 이 산 이름을 인왕산(仁旺山)으로 가운데 한자를 旺(왕)자로 바꾸어버렸다. 旺은 日(일)자와 王(왕)자가 합해진 것으로 자신들의 천황을 의미하려고 그랬던 것일까? 그러나 서울시에서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원래 이름으로 바꾸었다. 다행한 일이다.

무악재와 안산 방향으로 능선이 길게 뻗은 곳, 다시 말하면 부처님바위 뒤 봉우리에 설치한 곡장은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만든 시설이다. 평지의 치성과 같은 기능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의 전략적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지 지금도 거기에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지만, 미관상 달갑지만은 않다.

인왕산은 정상에 다가갈수록 가팔라지고 암반이어서 오르기에 숨이 차다. 성곽을 따라가다가 경사가 급한 곳은 깎아지른 암벽이어서 적군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곳은 암벽 또는 바위 자체가 성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천연의 요새다.

오늘은 정상까지 올라갈 수 없다. 일행이 너무 많아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선두에서 인솔하는 나는 뒤따르는 탐방객들을 기다리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약 15명에서 20명 단위로 조를 묶어 한주회(한겨레신문 주주모임) 회원들이 인솔했으나, 나이 든 탐방객들의 서행은 어쩔 수 없었다. 김 위원장과 최호진, 권용동 회원의 독려가 눈에 띄었다. 각 지점의 예정통과시간을 초과할 때면 나는 초조해져서 끊임없이 뒤돌아보고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빨리 오세요.’ 수없이 외치다보니 내 목청은 벌써 갈리기 시작했다.

 ► 인왕산은 우백호(右白虎)

오늘따라 올려다만 보아야하는 인왕산 정상, 낙월봉(落月峰)이다. 인왕산은 338m로 내사산 중에서 백악산 다음으로 높다. 인왕산 정상에서는 내사산 아래 집중된 서울을 가장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내사산 산정 모두 도성 안을 조망하기에 손색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단연 인왕산 정상의 조망을 선호한다. 무엇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바로 아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맞춤한 산정이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가장 중시했던 것은 주산을 정하는 것이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과 남산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을 동향으로 내야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일찍이 법궁의 정문을 동향으로 낸 적이 없다면서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리치고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았다. 그때 무학대사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도성이 큰 화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였을까? 개국 후 정확히 20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은 모두 불탔다.

조선 초 유신들의 주장에 따라 인왕산은 내사산 중 우백호(右白虎)가 되었다. 실제로도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 무악재는 원래 「모아재」라고 불렀다. 인왕산 호랑이가 행인을 해치므로 여러 사람이 모아서 재를 넘으면 호환(虎患)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한다. 이것이 나중에 발음이 변하여 현재와 같은 무악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된 기사가 여러 곳에 나온다. 고려 때 한성판관 강감찬이 노승으로 둔갑한 호랑이를 꾸짖어 그 호랑이가 무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갔다는 이야기며, 인왕산 호랑이가 무악재에서 고양시 효자리 선친의 묘소에 참배하러 다니는 효자 박태성을 매번 등에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 등 수없이 많다. 그렇지 않아도 곡장에서 정상으로 넘어가는 제 3봉인 주홀봉 능선에 웅크린 「범바위」는 인왕산의 고사를 뒷받침해준다고 할까?

인왕산은 온통 바위산이다. 군더더기 없는 정수만을 고스란히 남긴 정결한 모습이다. 산록에만 흙이 쌓여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아카시와 참나무 종류가 혼효림을 이루고 있고, 산중턱부터는 대표적인 양수(陽樹)인 소나무가 정상을 향해 포복하듯 엎드려있다. 한국적 진경산수가 진면목을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산정에 오를수록 바위가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다. 백호를 닮은 산이기 때문일까?

 ►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다

인왕산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내려다본다고 하여 연산군 9년(1503년) 그때까지 이 산에 있던 복세암, 금강암, 천향암 등의 사찰과 그 부근의 민가까지 모두 철거했다. 그해 11월에는 인왕산 입구에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여 아예 입산금지조치를 취했다. 조선시대 내내 인왕산은 도성안의 내사산 중 하나이면서도 일반 백성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가깝고도 먼 산이었다.

이런 사정은 근년 군사정권 아래서도 마찬가지였다. 안보상의 이유로 군사정부 내내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지금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의 시민들이 찾아와 등산과 암벽등반을 하면서 망중한을 즐긴다. 이제는 옛 도성의 자취를 내려다보며 영고성쇠 하는 역사의 무상함을 되새기는 시민공원이 되었다.

인왕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백악산을 향하여 내려오면 산록 길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군부대에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다.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오면 포장도로에 닿는다. 이 도로가 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인왕산스카이웨이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무장간첩이 침투한 이후 전략상 인왕산과 백악산에 낸 군사도로인데, 후에 그 길을 스카이웨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그 길은 인왕산과 백악산을 횡단하면서 엄청난 자연파괴를 하고 경관을 해친 도로가 되었다. 겸재 정선이 1750년경 필운대, 대은암, 청풍계, 청송당, 자하동, 독락당, 취미대, 수성동을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간송미술관 소장)의 배경은 이 스카이웨이와 군인아파트 때문에 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예로부터 경관이 수려한 인왕산

예부터 인왕산은 도성 안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조선후기의 대가 정선(鄭敾 1676-1759)은 비온 뒤의 산뜻한 풍경을 효자동쪽에서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 리움미술관 소장)를 남겼고, 강희언은 자하문 근처 도화동에서 인왕산도(仁王山圖)를 그렸다. 전자는 갓 삶은 창포물에 머리감은 새아씨같이 말끔한 인상을 주고, 후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포효하며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미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이 작품들은 그때까지 성행했던 중국의 관념산수(觀念山水)에 대하여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을 실감나게 그렸다고 하여 실경산수(實景山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정조대 중흥기를 맞으면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한국인의 자긍심은 회화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인왕산의 감명 깊은 정경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송홧가루 날리고, 아카시 꽃 질 무렵에 온다. 불붙는 석양의 꼬리를 물고 옥인동골짜기 황록색 융단 위에 어둠이 내리면, 꾀꼬리와 두견새들의 진혼곡을 들으며, 때죽나무와 산목련의 붙잡음도 뿌리친 채 그 화려하나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아까시 꽃들의 적멸은 온다. 우수수 우수수 자살특공대처럼 떨어지는 낙화의 저 비장한 최후를 본다. 꽃필 때까지 고난에 찬 이승이었다 하더라도 저토록 단아하고 초연한 하직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그 심오한 향기, 달콤한 꿀, 담백한 아름다움을 모두 떨치고 가는 영면의 길이 열반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함은 미물에 대한 내 상상력의 비약일까? 그럴 때 골짜기 어귀에 이윽히 머물며 청승맞게도 「동심초」나 「이별가」를 부른다. 그렇게라도 해야 저 허무한 운명에 직면하여 흔들리는 나의 실존을 위무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왕산은 산록이고, 골짜기고, 중턱이고, 산정이고 할 것 없이 불교적인 이미지로 우리를 감화시키는 것이다.

인왕산에는 이름난 바위가 많다. 이미 지나온 선바위, 모자바위(두꺼비바위), 해골바위, 부처님바위 외에도 범바위, 달팽이바위, 매부리바위, 기차바위, 치마바위, 장승바위 등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부처님바위는 우리들에게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얼굴」을 떠올린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제하는 것은 황금도 권세도 아닌 각성과 성찰이라는 교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왕의 저 높은 산정에서 망연히 바라보는 석양의 광휘와 곧 그 뒤따라 어둑한 핏빛으로 물드는 서울의 서부, 그리고 성저십리 너머 옛 개풍군까지 이어지는 김포평야의 아득한 지평선을 내려다보며 나는 조용히 저물어오는 황혼에 온몸이 묻힐 때까지 통일의 염원과 서울의 번영을 되새기곤 한다.

 ► 치마바위

모자바위 근처 송림에서 성곽으로 다가가면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근년에 만든 나무계단이 있다. 나무계단을 오르기 전 성벽에서 태조 때와 세종 때의 축성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들어선다. 초소 바로 앞에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서 능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인왕산 제2봉인 벽련봉 남쪽 중턱에 경복궁이 잘 보이는 크고 넓적한 바위가 치마처럼 쫙 펼쳐져있다. 이 바위가 치마바위라는 바위다. 이 바위는 중종과 그의 아내 단경왕후의 서글픈 사연과 관련이 있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의 주역 박원종과 성희안 등은 거사 전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을 만나 반정에 참여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의 사위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신수근의 가담은 반정의 성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은 반정세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왕의 장인이 되느냐, 현재의 위치를 지키느냐 하는 기로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는 말했다. 자기는 반정에 참여하지 않겠지만, 연산군에게 밀고하지는 않겠다고. 중종반정이 성공한 후, 신수근은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처단되었다.

신수근이 죽은 후 중종의 왕후가 된 신수근의 딸, 즉 단경왕후의 처리가 큰 문제였다. 반정공신들은 역적의 딸을 왕비로 뒀다가는 후환이 두려웠다. 결국 역적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명분에 따라 폐비가 된 신씨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친정은 인왕산 밑에 있었다. 왕이 되기 전 진성대군 시절 금실이 좋았던 중종은 폐비가 그리울 때면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 아래 신씨 집 쪽을 바라보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신씨는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중종의 마음을 달래려고 신혼 때 즐겨 입던 다홍치마를 매일 치마바위에 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편집 : 양성숙 부에디터  사진 : 권용동 주주통신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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