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평양 남북 마라톤 대회가 말해 주는것

1. 평양 대로를 달리다

이 거리 이름이 뭐였더라. 아까 교차로를 들어서며 봤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내 손을 잡고 달리고 있는 이 사람이 북한 사람은 분명한데 악수하며 말해주었던 이름 역시 지금 기억이 안 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달리기가 제일 힘들다는, 곧게 쭉 뻗은 대로의 끝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여기가 그저 북한의 수도 평양만 아니라면, 또 이 남자가 아프도록 꽉 잡은 손만 좀 놓아 준다면, 지금 바로 길바닥에 드러눕고 싶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그 역시 힘들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나이 먹은 남자치고는 미소가 귀엽다. 평양에서 버스 운전을 한다고 했던 것은 기억이 나네...길 옆 전신주에 광복거리라고 쓰여 있다. 여기는 평양. 나는 지금 런닝 팬티 하나 걸치고 주체사상탑이 내려다보고 있는 광복거리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2005년 11월 24일 오전 11시.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 항공 OZ 143편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북한 영공으로 진입해 평양 순안 공항에 착륙했다. 오마이 뉴스가 주최하는 남북 합동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150명의 남한측 사람들은 기내에서 숨을 죽이고, 커다란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는 평양 순안공항을 내려다 보았다. 사다리차가 다가오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북한 기관원인 듯한 사람 둘이 열려있는 문 양쪽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여권검사를 하고 사다리 밑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바로 탑승을 시켰고 버스는 채 삼십분을 달리지 않아 고려 호텔에 도착했다. 인천 국제공항을 드나드는 것보다 더 빨리 더 편하게 우리는 평양에 입성했다. 고려 호텔 로비에만 꽃다발을 들고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 TV에서 북한 관련 보도를 할 때 가끔 보이던 길가의 환영인파는 없었다.

▲ 입국사진
▲평양 순안 공항 : 착륙한 비행기가 천천히 기수를 돌려 김일성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갑자기 보였을 때- 지금 생각해도 압권이었습니다. 꼭 우리를 보고 웃는 거 같았거든요..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저녁 시간에 다들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평양 순안 공항버스 : 항공기 트랩을 내려와 바로 버스에 탑승하고 고려호텔로-지금까지 수십번의 출입국을 거쳤지만 평생 가장 편하고 빠른 입국이었지요

아무 대북 공식 목적 없는 민간인들이 단지 동호회 성격의 마라톤을 뛰겠다고 평양에 온 것은, 이제부터 수많은 민간교류가 시작 될 것이라는 신호탄 같은 것 이었다. 북한 사람 150명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마라톤을 뛴다고 상상해보라. 역사적인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었다. 참여정부의 잘못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조중동에게 남북의 주민이 손을 잡고 평양의 한복판을 뛰어 다니는, 화기애애한 모습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그들은 단 한 줄도 기사화 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일보 기자들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았던 북한정권과, 자신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참여정부에 졸렬하게 복수했다. 중앙과 동아 역시 기사를 내지 않았다. 국민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일반인들이 평양 대로를 달리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고, 청와대는 대국민 홍보를, 마치 정권의 치적 자랑하는 것쯤으로 여기는 듯 적극적이지 않았다.

2. 평양의 버스 노동자

겨우 5km를 뛰었는데 숨은 턱에 차고 다리 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프 마라톤이긴 하지만 10km도 완주해본 적이 없는 터라 그저 어디쯤에서 포기하고 걸으면서 실컷 평양 구경이나 해야지 하고 마음을 굳히는데 청춘거리에 접어들자 갑자기 길가가 응원으로 뜨겁다. 박수와 격려의 목소리가 달리는 내게 까지 잘 들린다. 어디서부터인가 ‘조선은 하나다’ 라는 구호가 시작되었다. 달리는 사람들이 ‘조선은’ 하면 길가에서 ‘하나다’ 라고 화답했다. 달리면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 더군다나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아마츄어 주제에 힘에 부쳤지만 그러나 이상하게 없던 힘이 솟아나왔다. 뻣뻣하던 다리 근육이 풀리는 게 신기하리만치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구호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래 조선은 하나다. 외세에 밀리고 일제 앞잡이들에게 치이고, 독재자들이 저들의 권력을 위해 우리를 갈라놓았어도, 그래 우리는 원래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열 덩어리가 올라왔다. 다리가 가벼워졌고 완주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솟았다. 5km 를 넘어서자 처음에 같이 출발했던 사람들이 실력 차에 의해, 차량이 통제된 8차선도로 위에 길게 줄 지워졌다. 옆으로 북한 선수 하나가 나를 앞지르려 하고 있었다.

“같이 갑시다”

북한 사람에게 말이라도 한 마디 붙이고 싶어서 그냥 한 소리인데 속도를 줄이고 웃으며 대꾸를 해준다.

“뛸 만 합네까?”

“아직은 괜찮습니다. 근데 뛰시는 거 보니까 선수 같습니다.”

“선수 아닙네다. 그냥 운동으로 하지요. 버스 운전하고 있습네다. 근데 서울서 오셨습네까?”

“예, 서울에서 장사하고 있습니다. 마라톤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복선을 깔아 두었다.

“반갑습네다.”

악수를 청하는 손이 건너왔다. 나는 그 손을 힘차게 잡았다.

세상에! 지금 내가 평양 시내 버스기사하고 이야기 하며 달리고 있다니! 불과 며칠 전만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리다보니 그가 나 때문에 속도를 많이 줄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아마츄어들의 마라톤이라 해도 경기는 경기인데...나는 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먼저 가세요. 나는 천천히 가지요. 시합 끝나고 만나면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

사십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그는 조금 수줍은 웃음을 뒤로하며 속도를 냈고 곧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많이 아쉬웠다.

▲ 고려호텔 객실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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