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에서 왕자님과 춤추고 급히 도망쳐 나와 사라진 신데렐라. 왕자가 그녀를 찾을 수 있었던 건 무도회장 정원에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 한 쪽 덕이었다. 수많은 여인들 중 그 구두가 발에 맞는 사람은 신데렐라뿐이었으니까.

서울역 근처 염천교에 구두거리가 생긴 건 1925년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이 생긴 이후다. 역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니 이곳이 번화가가 되었고 가죽 노점상들도 많아졌다. 양복과 중절모 쓴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이 구두 노점상을 찾았다. 6.25 전쟁 전후에는 미군의 중고 군화로 구두를 만드는 집도 생겨났다. 1970년대는 염천교의 전성기였다. 이후 서울 명동의 살롱화 매장이 유행을 선도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명동과 청량리 일대에 있던 제화 공장들이 본드 냄새 등 주민들의 민원이 커지자 자동차 정비소가 몰려 있던 성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 1910년 구두를 신고 있는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흥친왕

 “나이가 들면 우리 몸이 변형 되듯, 발도 그렇답니다.” 우리나라 구두의 역사와 함께 인생을 보낸 박광한(64) 주주는 서울 성수동 구두거리의 진정한 장인이다. 온몸의 무게를 감당하고 지탱해주는 '제2의 심장', 모든 장기로 통하는 기와 혈이 모이는 곳인 발을 감싸는 예술이 구두 만들기다.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이웃집 양화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그 후 봉천동, 이대입구, 염천교, 명동을 거쳐 이곳 성수동에서 47년째 구두를 만들고 있다. “대기업들이 천편일률적인 크기와 모양으로 만든 기성화의 위세가 날로 드세지만 맞춤구두의 수요는 결코 줄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가 운영하는 ‘아빠는 구두장이’ 공방에는 실제로 60여 명의 단골 고객이 몇 십 년째 그를 찾고 있다. 대부분이 여성 고객이라고 한다.

보통 구두를 만드는 전문가는 소위 ‘갑피’와 ‘저부’로 나누는데 이 두 가지 일 모두를 완벽하게 해내는 이는 자신이 유일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발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부터 디자인, 틀(라스트) 만들기, 재단, 완성품까지 완벽하게 직접 다 감당하니 진짜 ‘장인’이다. 구두 만들기를 시작한 후 그는 줄곧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해오고 있다. 대량생산을 위해 분업을 하기 시작하면 공정의 맥이 끊겨 온전한 의미의 ‘수제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구두에 대한 철학이다. 발의 모양과 상태, 부위별 길이와 두께를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 한 후 그 느낌 그대로 제작에 들어간다. “구두의 제작과정은 단순히 기계적 수치로 모양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구두가 완성 될 때까지 처음 발을 잴 때의 느낌을 그대로 가지고 정성을 다하기 때문에 그만큼 잘 맞는 것이다.” 

앞으로는 구두 만드는 일 외에 수제화 산업이 제대로 자리 잡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2013년부터 서울시, 성동구청, 서울디자인재단이 나서 이곳 성수동 구두 타운을 수제화 특화 산업 활성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이들은 수제화 제작 공정과 산업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예산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도 정책이 효과를 못 보고 겉돈다”며 지난 5월에는 그가 주도해 (사)한국제화산업기술협회를 발족시킨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 대기업이나 홈쇼핑, 중간 제조 유통 회사들의 갑질 문제와 수제화 문화 활성화를 위해 정부, 지자체와도 적극 소통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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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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