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44]:신장(新疆,신강)자치구 여행기-9

구마라집과 천재화가 한락연 김동호 주주통신원l승인2017.09.13l수정2017.09.1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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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는 큰 즐거움의 하나는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의 인물을 만나고 새로이 알게 될 때 느끼는 희열입니다.

중국이나 다른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불교유적을 많이 만납니다. 이천년 가까이 전래되며 많은 이야기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요.

그중에 석굴이 알려지면서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기위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역사의 흔적을 더듬기도 합니다. 용문석굴, 운강석굴, 돈황 막고굴은 이견이 없는 삼대석굴인데 이번에 들른 키질석굴을 가이드나 해설사가 사대석굴중의 하나라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 키질석굴 : 키질(kizil, 중국어: 커즈얼,克孜爾)석굴.

가이드나 현지 해설사 모두 그냥 천불동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릅니다. 길고 아름답게 늘어선 백양나무 사이로 걸어가다 보면 위 사진의 천불동 즉 키질석굴이 나오는데 입구에 동상이 있습니다. 200여년 후 당나라 현장법사와 함께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삼장법사로 쌍벽을 이루는 구마라집(鳩摩羅什) 동상입니다.

구마라집은 산스크리트어로 쿠마라지바의 중국식 이름을 우리 한자어 발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쿠마라지바가 원음이지만 한국에선 구마라집이란 이름으로 통용되었기에 그냥 사용합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344-413)은 구자국(龜玆國)왕의 누이동생과 인도 귀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구자국은 인도의 영향을 밀접하게 받았던 불교국가로 키질석굴이 있는 쿠처(庫車,고차)의 현지명도 구자국에서 유래하며, 쿠처라는 이름은 쿠차의 중국어 표기입니다.

구마라집은 7살에 출가를 하였고, 나중에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서 대승, 소승 공부를 하고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와 대승을 설파합니다. 당시 중국은 위진 남북조 오호 16국으로 혼란하던 시기. 후량의 침공으로 구마라집은 포로가 되어 18년을 양주에서 살게 됩니다. 나중에 후진의 황제가 그를 국사로 초빙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지요. 구마라집을 통해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전래가 됩니다. 많은 불교 용어들, 지금도 흔히 사용하는 극락이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용어도 그에 의해 쓰였습니다.

구마라집은 413년에 장안, 현재의 서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임종 직전에 ‘내가 전한 불경에 오류가 없다면 나를 화장해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화장 후에 시신은 모두 재가 되었으나 혀만은 타지 않았다고 고승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장법사가 천불동에서 50여일 머물렀다고 가이드가 소개합니다.

후에 당나라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고선지 장군이 이곳 절도사로 있으면서 서역정벌의 중심지인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 또한 신라의 승려 혜초도 이곳을 지나며 기록을 남겼지요.

당나라의 국력이 약해지자 이번에는 이슬람의 동 투르키스탄이 지배를 하며 불교 유적들은 파괴가 됩니다. 그 이후로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인들이 거주를 하고 있고요.

현지 여성 해설사가 자물쇠를 열고 석굴로 안내를 합니다. 이 해설사가 위구르인입니다. 위구르인이 하는 중국어 아무리 집중을 해도 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카메라 휴대는 안되고,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중앙에 있는 사진 두 점은 실제 벽화가 아니라 사진을 걸어놓은 것입니다. 해설사 뒤로 보이는 훼손된 벽이 실제 모습입니다.

독일인과 일본인 탐험가들이 중국인들의 표현대로 약탈해간 이곳 벽화입니다. 벽화를 타일처럼 칼로 구획을 나누고 뒷면을 벽에서 분리해 가져가서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약탈을 해간 탐험가들이 나쁜 사람인지, 관리를 못해 다 망가뜨리고 없애버린 그들이 나쁜 사람들인지?

전면 중앙의 본존불도 없고, 작은 홈에 무수히 안치되었을 작은 불상들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천장의 불화는 당시의 모습을 그래도 많이 보여줍니다. 천 몇 백 년이 지나면서 당시 붉은 색은 검게 변하고, 여러 색들도 빛이 바랬다고 합니다.

▲ 韓樂然(1898-1947, 한락연) 초상과 그가 벽에 쓴 글, 그리고 당시 폐허가 되어 양치기가 들락거리던 키질석굴의 모습

한 석굴에 들어갔는데 여느 석굴과는 달리 전면 벽에 글이 씌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의 사진들이 우측 벽에 붙어 있고요. 해설사가 너무 일찍 요절한 조선족 천재화가라고 소개를 해서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돌아와 자료(http://m.big5.mushihua.org/article/128029.html참조)를 찾아봤습니다. 50여년의 삶이 파란만장했습니다.

한락연은 1898년 연변의 용정촌에서 조선족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걸출한 정치 활동가, 인민예술가로 중국의 피카소라 불린다고 서술합니다. 자료에 ‘한락연은 중국조선족인민의 우수한 아들이며, 용정촌 인민의 자랑이다. 중국의 첫 번째 조선족 공산당 당원이고, 중국미술계 첫 번째 공산당 당원이며 일생을 바쳐 이룬 빛나는 공적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고 합니다.

소학교에 다닐 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렸고, 출중한 능력에 아버지도 몹시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림에 너무 빠지자 그림을 그려서는 밥 먹고 살기 힘들다며 아버지가 그림을 못 그리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래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동화의 한 장면과 같습니다.

1919년 고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연변에서 들고 일어난 3.13항일 운동에 참가를 하지만 진압이 된 후 소련으로 가서 혁명이론을 공부합니다. 1920년 상해로 돌아와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다음 해에 상해미술전문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합니다.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을 하고 1924년 대학을 졸업한 후 봉천(현재 심양)으로 가서 동북지역 당 조직을 이끌며, 동북지역 최초의 미술학교인 ‘봉천미술전문학교’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합니다. 1925년에서 1929년까지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의 신분으로 하얼빈에서 항일 애국운동을 비밀리에 수행하면서 작품 활동도 합니다.

1929년 말 당의 지시로 상해로 돌아온 후 프랑스로 건너가 일과 학업을 병행합니다. 1931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예술대학에 입학을 하고,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이태리 등을 다니며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습니다. 1932년 ‘중국재불예술학회’를 결성하고, 1934년에는 ‘중국동북4성재불학생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합니다. 1937년 프랑스, 독일 유학생들과 함께 귀국하여 항일 활동을 계속합니다. 1938년 혁명동지와 결혼을 하고 1940년 국민당특무기관에 체포가 되어 감옥에 들어갑니다. 1943년 동지들의 도움으로 출옥을 하고 1944년 서북지역에서 활동을 합니다. 이때부터 돈황석굴과 키질석굴에 대한 예술 가치를 알아보고 심도 있는 연구를 합니다.

1946년 유적지 연구를 위해 신장으로 갑니다. 이어서 다시 키질석굴에서 연구를 지속하며 이곳이 중국고대예술의 보고임을 알아봤습니다. 중국예술인 중 한락연이 처음으로 키질석굴에 체계적인 번호를 부여하고, 정리를 했으며, 기록을 남겨 중국예술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 한락연은 키질석굴의 그림을 많이 모사하여 후대에 복원할 때 참고하게 하였습니다. 우측 하단은 후대 혁명열사로 추인된 ‘혁명열사증명서’

1947년 봄 한락연은 다시 키질석굴을 방문하여 연구 활동을 마치고 우루무치에서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1947년 7월 우루무치에서 란주로 이동하던 중에 비행기 사고로 항일과 혁명 그리고 천재 예술가로 뜨겁게 살아온 한락연은 50도 안되어 명을 달리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한락연은 혁명열사로 추인이 됩니다. 1953년 한락연의 부인은 135폭의 대표작품을 국가에 기증을 하여 중국미술관에서 보관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대통령 표창 대상자로 지정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광복60주년기념-한락연특별전을 개최하였습니다.

편집 : 안지애 부에디터, 이동구 에디터

김동호 주주통신원  donghokim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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