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녀들이 어떻게 순번을 정해 나에게 오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궁금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겹치기로 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자기들끼리 번호표를 뽑아 순번을 정하는 건지 아니면 무작위로 추첨을 하여 나에게 오는 건지 나로서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동거녀에게 물어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 누가 오든 말든 나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처음 몇 년간은 나에게 다가올 동거녀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여자가 그 여자였다. 인간은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나를 너무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질시할 필요도 없다. 알고 보면 나도 불쌍한 놈이다. 온갖 유형의 동거녀들에게 시달려 세월 가는 줄도 몰랐다. 얼떨결에 나이 팔십이 된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평생 한 명의 동거녀와 사는 사람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건 정말 빈 말이 아니다.

『지각의 현상학』의 저자이며 '몸의 지각'이론으로 잘 알려진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나의 신체 안에서 다양한 나의 신체부위들이 하나의 불가분의 체계를 이루고 있듯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신체적 주체들은 근원적인 지각의 세계에서 하나의 불가분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개인의식이 사회의식과 연결되어 있듯이 ‘나’라는 신체적 주체는 다른 신체적 주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메를로퐁티의 견해대로라면, 나와 동거한 숱한 동거녀들은 지각의 세계 안에서는 물론이고, 신체적으로도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선생이 한 말이 생각이 난다. 그 선생은 나이 들어 결혼하여 노총각 신세를 겨우 면했는데,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첫 수업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낮에는 요조숙녀로 있다가도 밤이면 창녀나 요부로 변하기도 한다."며 당시로서는 알듯 모를 듯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생이 수업시간에 사춘기의 학생들에게 저런 말을 해도 되는가, 의아해했지만 살다보니 일리가 아주 없는 말도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변신은 무죄다. 그런데 왜 남자는 여자만큼 변신을 못하는 걸까? 결혼한 후 세월이 흐를수록 여자들이 콧대가 세지는 이유가 있다. '아내'들은 변신을 거듭하면서 갈수록 진화하는데 '남편'들은 변신을 거부한 채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상은 대를 이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동거녀를 유형별로 구분해본다. 대략 24가지로 구분된다. 알파벳 A부터  Z까지. 나에게 자상하고 상냥하며 미모까지 갖춘 동거녀를 A그룹으로 분류하고, 상냥함이나 미모가 떨어질수록 알파벳 순서로 B, C, D로 분류해나가다가, 제일 퉁명스럽고 싸가지 없으며 자아애와 분노에 찌들어 나를 비난하기 일쑤인 동거녀를 최하위 V, W, X, Y, Z그룹으로 분류해본다.

물론 나는 A그룹의 동거녀가 오기를 바라지만 아쉽게도 선택권은 나에게 없다. 동거녀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는 건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선택권은 동거녀들에게 있다. 어떤 순서로 오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려고 해도 알아낼 방법이 없다. 어쩌다 V그룹부터 W, X, Y, Z그룹에 이르기까지 최하위그룹에 속한 동거녀들이 연속적으로 오는 경우가 있다. 아! 그 기간 동안 나의 삶은 얼마나 처참하게 변하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지! 그럴 때 내가 얼마나 비극적인 삶을 사는지 안다면 아마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사회에서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며, 돈을 억수로 많이 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졸지에 '비극은 나의 것이요, 불행은 나의 모든 것'이 된다.

반대로 A그룹을 필두로 한 최상위 그룹의 동거녀들이 올 때면 나는 평화와 행복의 안심권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걱정과 불행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동거녀가 나의 심기를 살피면서 모든 걸 알아서 척척 해주고, 주야로 받들어 모시니 말이다. 동거녀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르는 듯하다. 남자들이 강한 척, 센 척 하니까 그런 줄 아나보다. 사실은 여자들보다 더 상처를 받고, 더 여린 마음을 지닌 게 남자들인데도 말이다. <계속>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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