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떠도는 말 중에 나이를 먹을수록 진리라고 여겨지는 말들이 있다. 이를테면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개중에는 크게 잘못 알려진 말도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도대체 이 말처럼 무지몽매한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혼한 부부는 이심이체(異心二體)일 뿐이다. 일심동체라는 말만 믿다가 쪽박 찬 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내가 결혼하여 일개 필부의 아내로 산지 어언 오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 말이 얼마나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부부싸움을 하게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지 모른다.

사실 여자들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시집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시집가서 보니 남편이란 자는 전혀 일심동체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일심동체는커녕 異心異體요 二心二體에 가까웠다. 두 몸과 두 마음이요, 다른 몸과 다른 마음이다. 나이 들고 이제 와서 보니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결혼하여 오십 년을 살아도 아직 일심동체가 안 되는데, 결혼하자마자 일심동체를 기대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일심동체라는 환상 속에서 미로를 헤매다가 헤어지는 부부들을 보면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이제 남편이란 작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를 엄청나게, 몹시도 사랑하는 줄 알았던 건 나의 착각이었다고 치자. 그런데 살다보니 나를 일개 가사도우미나 동거녀 정도로밖에 안보는 것 같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수차례 떠보고 질문해보고, 검증에 검증을 거듭해본 결과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확신을 갖는데 거의 오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와서 이혼을 들먹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편이란 작자들이 이렇게 형편없이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줄 알았다면 결혼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눈치는 왜 그리도 없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말해주지 않으면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화라도 낼라치면 나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라니! 이젠 그런 표정도 지겹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왜 자기를 비난하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잘 대해주고 자신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기만을 바라는 어린애 같은 인간이 바로 내 남편이란 작자다. 애물단지도 이런 애물단지가 없다. 어릴 적에 이모나 고모들이 이모부나 고모부를 '원수 덩어리'라든가 '저 화상'이라고 부르던 게 이제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자기 잘난 맛에 평생을 살아온 남편이지만 십여 년 전부터는 그래도 잘 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자녀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 사위와 며느리를 본 것은 물론이고, 손주들마저 시집 장가를 갈 나이가 되다 보니 남편의 흉을 보기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남는 것은 남편 밖에 더 있겠는가. 못나도 내 남편이요, 잘나도 내 남편이다. 늙어서 구박한들 내 청춘이 되돌아 올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 남편이 이제 암 수술을 마치고 병상에 누워 있다. 나이 팔십에 암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남편이 한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다. 제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 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오십여 년을 같이 살아 그런지 병들어 누워있는 남편을 보는 내 마음도 그리 편치만은 않다. 과일을 사들고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간다. 병실에 들어서니 노인 한 명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를 가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듯하다. 갑자기 남편이 가엾어 보인다.

병상에 누워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자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냥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와 함께 보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나도 더 이상 이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완전히 접으련다. 이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 왔던가. 얼마나 내가 애를 썼는지 이 인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 돌이켜보니 그런 애씀이 과연 사랑이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애물단지에 내가 환상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편의 못나고 부족한 부분을 고쳐서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려는 나의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걸까. 그런 나의 마음 밑바닥에는 이기적인 사랑이 도사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갈등과 불화만 조성된 건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남편의 부족하고 못난 것을 채워주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이라는 애물단지 속에서 허우적거린 세월이 아깝고 내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이 팔십이 되어도 남편이 철들기는 먼 것 같다. 암수술을 받는 기간에 무엇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긴급히 남편 이멜을 들여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 나이에 젊은 여자와 이멜을 주고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젊고 예쁜 외국 여자 사진에 속다니, 어이가 없다. 이멜은 그렇다고 치자. 사기까지 당해서 돈 몇 백만 원을 홀라당 날렸다. 이런 영감탱이를 정말 데리고 살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래서 한 마디 했더니 발끈하며 정보통신보호법 운운한다. 적반하장의 대가(大家). 그 자가 내 남편임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차마 몰랐다.

내가 이혼 말을 꺼내니 얼른 꼬랑지를 내리는 꼴이라니. 남편이란 작자들이 모두 이 모양이다. 그러나 나의 변심과 변신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기에 참아준다. 남편은 내가 왜 그렇게도 변심과 변신을 해왔는지 무척 속으로 궁금해 했을 것이다. 이런 걸 두고 내조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이란 작자가 그 사실을 인정할지 안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이제 남편이 쾌차하는 일 이상으로 중요한 건 없다. 이제부터는 건강이 최고다. 이 작자가 아플 때 내가 돌봐야하듯이, 내가 아프면 나를 돌볼 사람도 그나마 이 작자밖에 더 있겠는가. 출가한 자식들은 제 자식들 앞가림해주기 바쁘다.

남편을 변화시키려는 마음과 욕심을 내려놓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 없다. 진작 그럴 걸 그랬나보다. 여자 나이 칠십대 중반에 이르러 이제부터는 나도 편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편의 이마를 쓸어주며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니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나를 반긴다. 구름 타고 너울너울 내 마음도 춤을 춘다. <끝>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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