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창의의 임창모(林昌模) 의병장

 

공은 조양 임씨이며 자는 낙균(洛均), 호는 월담(月潭)이다. 남을 이해할 줄 알고 굽힐 줄 모르는 굳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을사5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나라 팔아먹은 놈들과 왜적을 모조리 없애지 못함을 억울해하고 분해하였다. 광무 10년(1906년) 병오년에 의병장 양회일이 능주에서 의거를 일으키자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복천에서 적의 대병에게 포위되어 회일과 함께 붙잡혀서 지도에 갇혔다가 1년 만에 석방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 집안 재산을 모두 팔아 무기를 준비하고 장사들을 모아서 융희 2년(1908년)무신년 봄 500여 명의 의병들과 더불어 일어섰다. 정태화을 선봉장으로 삼고, 임봉수는 포병장으로 강영섭, 임하중, 임양표를 참모로 삼아 의병의 진영을 갖추었다.

▲ 임창모장군의 격문

단을 쌓고 소를 잡아 피를 뿌려 하늘과 땅의 신들께 고사를 지내고 났을 때 적군이 고흥에 상륙하여 보성으로 행진한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즉시 출동하여서 적을 가장 막기 좋은 자리에 매복해 기다리다가 공격하여 대부대를 죽이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가령치에서 완전히 파멸시켰다.

▲ 끝내 목숨을 바치고

이때 안담산 의병장이 큰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공의 의병대와 안달산 두 세력이 거의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다 안의병장이 의병을 해산하자 흩어지게 된 의병들이 모두 임창모 의병대로 모여들었다. 융희 3년(1909년) 8월 29일 밤에 108명의 정예부대와 함께 복내 흑석동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 아들 중군장 학순이 교전을 계속하다 아들마저 적탄에 쓰러지니 학순의 나이 22살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의 유해를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 이때 적장 石富가 부자의 충혼에 조문을 하고 후한 조위금으로 위문하려 하였으나 임창모 의병장의 처 임(任)씨와 자부 최씨는 즉석에서 거절하였다.

광복 후에 임태규, 임의돈, 임경철 등 다수의 향리 학자들이 용문리 주름방죽 옆 산기슭에 충의비를 세웠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을 그의 4대손 임하회에게 수여하고 그의 충의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였다.

 

<참고 : 韓國獨立運動史, 全羅南道誌에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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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김선태 주주통신원  ksunt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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