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주가 되어 백성을 구히는데 앞장 선 의인

 농민봉기 동학혁명과 고장의 접주 박태로(朴泰潞)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니 조정은 세도정치와 붕당 다툼으로 날이 저물었다. 시골 마을은 탐관오리의 횡포로 무고한 백성과 양민들이 악독한 형벌을 당하거나 감옥에 쳐 박혀 죽었다. 혹독한 고문에 불구가 되고 재산을 몽땅 빼앗기는가 하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학정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사정을 보고 견디다 못한 호남의 녹두장군 전봉준과 호서의 손병희 두 기수는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즉 백성이 하늘이요 주인이다) 신앙과 근대적인 혁명 정신으로 고종 31년 갑오년(1894년) 2월에 제폭구민(除暴救民: 폭정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하자)의 뜻을 높이 세우고 일어섰다.

농민들은 농기구를 들고 싸움터로 나섰다. 정부에는 비폭력 항쟁으로 폭정을 바로잡아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을 상대로는 민족국가의 국권을 지키자고 ‘보국안민’(保國安民: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케 하자)과 ‘척왜 척양’(斥倭斥洋: 왜군을 물리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자)을 내세우며 동학도인 농민 대중들은 피를 흘리며 싸웠다.

최초의 동학운동은 고부(지금의 정읍)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삼남지방을 휩쓸었으며 남원과 전주를 비롯한 이웃 고을 장흥까지 차례로 함락하면서 동학도들은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다. 동학의 성난 물결은 더욱 거칠어졌고 민심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등의 파괴 행동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난리가 끝나면 폭도로 몰려 불쌍하게 죽어갈 농민들이 가엽다고 생각한 겸백면 사곡리의 접주 박태로는 며칠 동안 고민을 하다가 살신성인의 결정을 내려 많은 농민들을 구한 구세주가 되었다. 그는 고장의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보성군의 접주(총두목)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무란작벌, 민가토색, 사감보복행위 엄금’이라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포고문은 공연한 사람에게 벌을 내라는 일, 민간인의 재산을 빼앗는 일,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보복행위 하는 일을 일체 금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일을 기회로 남을 공연히 괴롭히는 일을 일체 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직 구국보민(救國保民: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보호함)과 제폭안민(除暴安民: 나쁜 벼슬아치의 폭정을 없애서 백성들을 편안케함)에 힘써야 한다는 큰 뜻을 널리 알림으로써 군내에서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질서를 잘 잡아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당시 군수 유원규는 성을 비우고 도망을 칠 수도 성을 지킬 수도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듯 박태로 접주를 찾아가 그의 뜻에 깊이 감사드리며 관내가 편안하도록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태로는 이듬해 을미년에 동학토벌대장 이풍년에게 체포되었고 그해 4월 27일 45세로 낙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고장 주민들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고장을 살리고 백성을 사랑한 투철한 정신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원통한 죽음을 슬퍼하며

‘태로야 태로야 박태로야

보성군민 다 살려 놓고

검은 콩알 하나 못 이겨서

저 세상으로 가시었는가‘

동요를 지어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공의 후손들이 득량면 다전 마을에 살고 있다.

 

<참고 : 安泰時, 宣泰奉, 鄭海璋, 曺秉晉등 고을 어르신들의 증언으로

취록하여 수록한 1974년판 寶城郡鄕土史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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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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