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10~111일째

남자도 가슴 저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슬픔 같은 것이 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쌓인 나쁜 기운들이 있다. 그것들을 어디론가 멀리 가서 다 쏟아 붓고 빈자리에 새롭고 활기찬 기운을 담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위로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60세의 나이에도 꿈이나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쯤해서 이번 여정이 전적으로 통일에 대한 열정이나 평화를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해야한다.

고속열차처럼 쉼 없이 달려온 인생. 삶에도 쉼표는 필요하고, 정거장은 필요하다. 큰 세상을 만나보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싶었다. 중년 이후 삶은 경쟁 논리가 아니라 즐기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사회에 공헌도 할 수 있으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에서 시작한 것이 이번 여정이므로 지나치게 나를 영웅시하는 것은 부끄럽고 낮 간지러운 일이다. 그렇게 내딛은 발걸음 중에 통일을 만나고 평화를 만나 동행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여행은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한다. 나의 여정이 처음 계획보다 나도 놀랄 정도로 좋게 바뀌었다. 나의 동반자들은 나를 새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노는 입으로 염불 한다’는 말이 있다. 기왕에 하는 일 없이 노는 입으로 염불을 해서 해탈을 이룬다면 그것은 최상의 시나리오다. 기왕에 아주 멀리 떠나서 쏟아 붓고 싶은 내 안의 오물 같은 감정을 안고 길을 나서서, 평화통일의 필요성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면서, 남과 북 모든 시민들과 세계인들과 공유하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이겠다. 나는 지금 나도 놀라울 정도로 통일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들개에게 다시 물릴 각오를 하고 손에 들었던 쇠파이프를 던져버렸다. 물론 왁신을 두 번이나 맞은 든든함이 한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자 일리씨라는 작은 마을을 출발해서 아바나라는 도시에 들어서면서부터 개 한 마리가 비를 맞으며 뒤 따라온다. 따라오면서 가끔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쓰다듬어달라고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댄다. 목을 만져주고 다시 뛰어가려니 바둑이도 한 마리 같이 쫒아온다. 비 내리는 바닷가에 개 두 마리가 동반해주니 적적하던 마음이 든든해진다.

▲ 2017년 12월 20일 터키 Ilisi Köyü에서 Güzelkent Köyü까지 달리면서 만난 떠돌이개들

이 녀석들은 5km 정도 같이 뛰고는 임무를 마친 경호요원처럼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그동안 쇠파이프를 들고 뛰는 모습을 보던 사람들로부터 평화마라톤 이미지와 다르게 조폭 같다고 항의 받아온 터였다. 무기를 버리고 개와 눈이 마주칠 때, 달리기를 멈추고 최대한 개가 놀라지 않게 배려하니 개들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무기를 버리니 평화가 찾아왔다. 개들과 평화협정, 내가 평화운동가로서 처음으로 체결한 평화협정은 성공적이었다.

실크로드만큼 영감을 주고, 위안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도전하고픈 투지를 일깨워주고, 역사적이며 애환이 서린 포괄적인 길은 없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끝없이 달리면서 태양 너머에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를 이방인으로 만나 어떤 감정을 교류하고 또 얼마나 큰 이별의 아쉬움을 남기며 발길을 돌릴지 늘 궁금하다. 사람들의 뛰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것이 우리 이웃 이야기요 바로 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내가 지나는 유라시아는 광활하지만, 내가 달릴 길은 명주실처럼 가늘면서 질긴 길이다. 수만 년에 걸쳐 인류가 더 좋은 삶을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며 목숨을 내놓고 장삿길에 나섰던 길이다. 때로는 전쟁을 피해 눈물을 머금고 정든 땅과 친지들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길이다. 다 태우지 않으면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것이 내 안에 있다. 나는 그것을 다 태우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이 길을 달린다. 평화의 원산지는 마음에 있다.

홀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여행을 하다 보니 대지에 흐르는 기운이 말해주는 세상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체득하게 된다. 엄청난 긴장과 마음의 충만을 즐길 줄 알게 된다. 길 위에 나서자 퇴화된 날개근육만 남아서 새장을 열어주어도 날아갈 줄 모르리라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물 만난 고기처럼 훨훨 잘 날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피곤에 절은 몸은 소금에 절은 배추처럼 오히려 알 수 없는 기운이 몸 전체에 뻗쳐나갔다.

터키인들 눈빛은 흑해 햇빛과 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의 눈빛은 온화하다. 절대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어떤 삶이라도 우수한 삶이나 열등한 삶은 세상에 없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전혀 맞지 않다. 오랜 세월 거치면서 형성된 개성과 자율적인 생활양식, 문화가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전통과 문화와 종교를 바꿀 권리는 없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가치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나그네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미덕이다.

▲ 2017년 12월 20일 터키 Ilisi Köyü에서 Güzelkent Köyü까지 달리면서 만난 흑해연안의 터키

나그네는 지금껏 살아오지 않았던 생활 방식과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으며, 보지 못했던 풍광을 즐기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장사꾼이나 정치인 더더욱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모험가나 여행자로서 그리고 평화운동가로서 현지인들과 만나야 한다. 왜 그들이 귀한 시간에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는지, 왜 모스크에 저리도 높은 첨탑을 짓는지, 왜 찻집에 여자가 보이지 않고 이발소는 그리 많은데 미용실은 보이질 않는지 이해하게 된다.

발은 길을 달리고 눈은 거리 풍경을 따라 달리지만 마음은 내면을 정찰하듯 날아다닌다. 나는 가끔 GPS가 작동하지 않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를 때 극도로 불안하다. 그렇게 샅샅이 내면을 바라보고 내가 누구인가 답을 얻으면 마음의 평화가 올 것이다. 여행이란 단순히 풍광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땅 위의 습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듯 자연의 경이로움을 바라보며 의식과 무의식 속으로 스며든 상상력으로 구름처럼 무궁무진한 조화를 부리는 가슴 떨리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실크로드를 따라 오고갈 보물들이 수없이 많다. 그 중 최고는 평화다. 이제 이 길로 평화가 넘나들면서 세계는 안정되고 국가 간 장벽은 무너지고 여권이나 비자가 필요 없는 지구촌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군비는 사상유래 없이 축소되어 사람들은 더 풍요롭고 여유로워질 것이고 문화는 더욱더 꽃 피울 것이다.

▲ 2017년 12월 20일 터키 Ilisi Köyü에서 Güzelkent Köyü까지 달리면서 만난 이정표
▲ 2017년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12월 20일 터키 Güzelkent Köyü까지(누적 최소거리 약 3986.92km)

* 평화마라톤에 대해 더 자세한 소식을 알고 싶으면 공식카페 (http://cafe.daum.net/eurasiamarathon)와 공식 페이스북 (http://facebook.com/eurasiamarathon), 강명구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kara.runner)에서 확인 가능하다. 다음카카오의 스토리펀딩(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8063)과 유라시안마라톤조직위 공식후원계좌(신한은행 110-480-277370/이창복 상임대표)로도 후원할 수 있다. 

[편집자 주] 강명구 시민통신원은 2017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2개월간 16개국 16,000km를 달리는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는 2년 전 2015년, '남북평화통일' 배너를 달고 아시아인 최초로 미대륙 5,200km를 단독 횡단한 바 있다. 이후 남한일주마라톤, 네팔지진피해자돕기 마라톤, 강정에서 광화문까지 평화마라톤을 완주했다. <한겨레:온>은 강명구 통신원이 유라시아대륙횡단평화마라톤을 달리면서 보내주는 글과 이와 관련된 글을 그가 마라톤을 완주하는 날까지 '[특집]강명구의 유라시안 평화마라톤'코너에 실을 계획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강명구선수유라시아평화마라톤 111일째(2017년 12월 20일)

강명구 시민통신원  myongkuk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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