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속 요조숙녀 같은 꽃 얼레지

'얼레지'와의 첫 만남

얼레지는 야산에서는 볼 수 없다. 비교적 높고 깊은 산에 가야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야생화 동호회에서 남양주 천마산 번개할 때 처음 대면했다. 고갯마루 쉼터에서 팔현리 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는데 펑퍼짐한 사면에 갑자기 고개를 숙인 붉은색 꽃이 도열하듯 눈앞에 펼쳐진다. 요조숙녀 같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이 붉은색 꽃이 바로 얼레지란다. 봄에 피는 꽃은 대체로 노란색이거나 흰색이 주종을 이루는데 숲속에 온통 붉은색 꽃밭이 펼쳐지다니. 눈앞에 밭을 이루어 펼쳐진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와! 하는 감탄이 절로 났다. 그 후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가는 길에서 본 얼레지는 잎도 꽃도 크고, 유난히 붉은빛이 선연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남해군 금산의 보리암 뒷산에서 본 얼레지는 색깔도 연하고 어딘지 외로워 보였다.

▲ 오대산 상원산 적멸보궁 가는 길에서 만난 얼레지
▲ 남해군 금산 보리암 뒷산에서 만난 얼레지

‘얼레지’라는 국명의 유래

산림청 국립수목원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추천하고 있는 ‘얼레지’란 국명은 정태현 외 3인의 <조선식물향명집(1937)>에 처음 등재된 ‘얼네지’에서 유래한다. 그 후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1980)>, 이우철의 <한국식물명고(1996)> 등에서는 ‘얼레지’라 하였다. ‘얼네지’나 ‘얼레지’는 발음이 비슷한데서 오는 표기상의 일시적 혼란으로 여겨진다. 얼레지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서양의 슬픔을 노래한 시 또는 그러한 가곡 엘레지(élégie)가 연상되어 어딘지 외래식물명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우리나라 자생식물이다.

▲ 백암산에서 만난 얼레지 잎과 뒷모습

왜 이름이 ‘얼레지’가 되었을까?

그런데 왜 ‘얼레지’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혹자는 한의학에서 발기불능에 약으로 쓰는 개의 음경을 ‘엘레지’라고 하는데 이게 변해서 '얼레지'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 꽃이 피기 전 얼레지의 맺힌 꽃봉오리 모양이 개의 음경과 흡사하여 그럴 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꽃이 핀 모양이 연 날릴 때 실을 감는 도구인 얼레 비슷한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잎 표면에 얼룩덜룩한 자주색 무늬가 있어 얼레지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 개의 음경 같이 생긴 얼레지 꽃봉오리

‘얼레지’의 다른 국명 '가재무릇'

한편 박만규는 <우리나라식물명감(1949)>에서 얼레지를 ‘가재무릇’이라 명명하였다. 일찍이 정태현 외 3인은 <조선식물향명집(1937)>에서 ‘얼네지’를 다른 국명으로 ‘가재무릇’이라고 했는데 이와 같은 것이다. 왜 얼레지를 가재무릇이라고도 했을까? 식물분류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었던 민간에서는 백합과나 수선화과의 일부 식물들도 공통적으로 땅속 비늘줄기가 있다는 점에서 크게는 무릇의 일종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예로부터 민간에서는 백합과의 산자고를 까치무릇, 수선화과의 석산을 꽃무릇 또는 가을가재무릇, 상사화를 개가재무릇이라고도 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얼레지를 생약명으로 산자고, 차전엽이라고도 한다. 비늘줄기의 약효 면에서 까치무릇과 비슷하여 산자고라 하고, 잎의 모양이 질경이와 비슷한 데서 차전엽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 3월 하순 백암산에서 만난 꽃이 피기 전 얼레지 군락

가재무릇의 ‘가재’의 어원에 대하여

얼레지의 꽃 모양이 민물에 사는 갑각류의 일종인 가재의 집게다리 모양과 유사한 데서 가재무릇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으나 모양이 전혀 딴판이라서 설득력이 희박하다. 그렇다면 가재무릇의 ‘가재’는 어디서 온 말일까? 병마개라는 단어에서 ‘마개’란 명사는 동사 ‘막(다)’에 명사화 접사 ‘-애’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로 ‘막+애’로 형태분석이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재 역시 ‘갖+애’로 분석할 수 있다. 여기서 ‘갖’은 무슨 의미일까? 한자에서 같은 뜻을 지닌 글자 가운데 보통 쓰는 글자보다 획을 더 많이 써서 모양과 구성이 전혀 다른 글자를 우리는 ‘갖은자’라고 한다. 예를 들면 ‘一’에 대한 ‘壹’, ‘二’에 대한 ‘貳’, ‘三’에 대한 ‘參’ 따위와 같은 글자들과 같다. 그러므로 가재의 ‘갖’과 갖은자의 ‘갖’은 어원이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얼레지는 무릇과 같은 백합과 식물이지만 잎 모양이나 꽃의 구성이 무릇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땅속에 비늘줄기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는 무릇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래서 얼레지를 가재무릇이라 한 것이 아닐까?

▲ 백암산에서 만난 얼레지

‘얼레지’의 학명과 뜻

얼레지를 학명으로 “Erythronium japonicum Decne”라고 한다. 속명 ‘Erythronium’은 붉은색을 뜻하는 희랍어 ‘erythros’에서 온 말인데 백합과의 유럽종은 붉은색으로 피는 꽃이 많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종소명 ‘japonicum’은 ‘일본의’란 뜻이다. 얼레지의 학명은 프랑스 식물학자 Joseph Decaisne(1807~1910)이 처음 기재하였다. 그는 일본에 나는 붉은색 꽃이 피는 백합과 식물이란 뜻을 학명에 담아 명명했다. 중국에서는 얼레지를 저아화(猪牙花), 모저아(母猪牙) 등으로 부른다. 아마도 화피의 모양이 멧돼지의 어금니처럼 뾰족한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서는 ‘카타꾸리(カタクリ, 片栗)’라 한다. 영문명으로는 ‘Asian fawnlily’라 한다. 미국산 엷은 황갈색 백합과 식물 비슷한데 얼레지는 아시아에 난다는 뜻이다. 달리 ‘Dog-tooth violet’이라고도 한다. 역시 화피의 색깔이 보랏빛인데 모양이 개의 송곳니 모양과 비슷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 천마산에서 만난 얼레지

‘얼레지’의 분포와 형태적 특성

백합과에 속하는 얼레지는 세계적으로 중국, 러시아의 사할린 섬 남부, 쿠릴열도 남부, 일본 등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는 얼레지속에 얼레지와 흰얼레지 두 종이 자생한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깊은 산 속 낙엽수림 밑 비옥한 땅에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뿌리줄기는 점차 자라면서 땅속 깊이 20~40cm까지 들어가며 그 끝에 비늘줄기가 달린다. 비늘줄기는 길이 5~6cm, 폭 1cm 정도의 긴 달걀형이며, 거죽은 연한 황갈색을 띤다. 잎은 꽃줄기 밑에 보통 2장이 달리며, 길이 6~12cm, 폭 2.5~5.0cm의 긴 타원형 또는 좁은 달걀형이다. 잎끝은 둔하거나 약간 뾰족하고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잎 표면은 보통 녹색 바탕에 자주색 얼룩무늬가 있는데 수정이 끝나면 대개 없어진다. 잎자루는 길지만 땅속에 묻혀 있고 땅위에는 잎몸만 드러난다. 꽃은 4~5월에 붉은 보라색으로 아래쪽을 향해 피는데 높이 15cm쯤 되는 꽃줄기 끝에 1개씩 달린다. 화피는 6장이며, 피침형으로 길이 5~6cm, 폭 0.5~1.0cm, 완전히 피면 끝이 뒤로 말린다. 화피 안쪽 밑부분에는 W자 모양의 짙은 자주색 무늬가 있으며, 그 아래쪽에 꿀샘이 있다. 수술은 6개이며, 꽃밥은 자주색이다. 암술대는 수술보다 약간 길며, 암술머리는 3갈래로 갈라진다. 열매는 삭과이며, 3개의 능선이 있다. 7~8월에 익는데 능선 안에 선형의 씨가 들어 있다.

▲ 얼레지 열매

'얼레지'의 종족 보전을 위한 전략

식물은 동물과 달리 나름의 독특한 전략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간다. 민들레는 씨앗에 붙어 있는 갓털을 이용하여 바람을 타고 멀리 이동한다. 도둑놈의갈고리나 도깨비바늘은 열매에 달려 있는 갈고리를 이용하여 동물의 몸에 달라붙어 새로운 세계로 이동한다. 봉숭아는 다 익은 꼬투리를 탁 터뜨려 씨를 멀리 날려 보내는 방법으로 영역을 넓혀 나가기도 한다. 얼레지는 어떻게 할까? 뜻밖에 개미의 도움으로 영역을 넓혀간다. 녹음이 짙어지면 잎은 거의 시들어 버리고 열매가 성숙하면 3갈래로 갈라진다. 그 속에 여러 개의 길쭉한 씨가 들어 있는데 지방산, 아미노산, 포도당 등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인 엘라이오좀(elaiosome)이라고 하는 것이 씨를 감싸고 있다. 그래서 개미들은 얼레지의 씨를 열심히 개미집으로 물어 나른다. 얼레지 씨에 붙어 있는 엘라이오좀은 개미 유충들의 훌륭한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엘라이오좀을 다 먹고 난 씨는 개미의 배설물과 함께 개미집 주변에 내다 버린다. 이렇게 하여 얼레지는 부모로부터 떨어진 새로운 자리에 터를 잡아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 얼레지는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개미와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 개미의 식량이 되는 얼레지 씨 겉에 붙어 있는 엘라이오좀(elaiosome)

'얼레지'의 수분(受粉)을 위한 전략

외떡잎식물인 얼레지는 처음 발아할 때는 잎을 하나만 달고 나온다. 점점 자라면서 해들 거듭할수록 뿌리줄기는 땅속 깊이 뻗어 내려가며 덩치를 키운 비늘줄기에 영양분을 저장한다. 무려 5~6년을 자라야 비로소 두 장의 잎이 나오고, 그제야 잎 사이에서 꽃대가 하나 나와 꽃이 핀다. 꽃향기가 없는 얼레지는 수분을 위한 전략도 독특하다. 햇볕이 없을 때 절대로 화피를 열지 않고 딱 오므리고 있다. 오직 화려한 치장으로 벌, 나비를 유인해야 하기 때문에 햇빛이 필수적이다. 벌, 나비가 활동하기 좋을 정도로 맑은 날씨에 햇빛이 나면 오므렸던 화피를 펴기 시작한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속살이 훤히 보이게 화피를 완전히 열어젖혀 화피 끝을 말아 뒤꼭지에 붙인다. 화피 안쪽에는 자주색 W자 무늬가 선명하게 나 있다. 이것은 비행하는 곤충을 안착시키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 암술은 수술보다 길어서 자가수분을 방지하고 타가수분을 한다. 꿀샘이 있는 씨방으로 들어가려면 자연스럽게 다른 꽃에서 묻혀온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묻힌다. 얼레지는 종족을 번창하기 위해 나름 고도의 전략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 광덕산에서 만난 보기 드문 품종 흰얼레지

'얼레지'의 이용

얼레지는 자주색 꽃이 예뻐서 원예적 가치가 높은 자원식물이기도 하다. 5월 말경에 익은 열매를 채취하여 씨를 받아 낙엽수 아래 곧바로 뿌리면 이듬해 봄에 싹이 터서 1장짜리 잎을 달고 나온다. 여름이 되면 땅위의 잎은 시들어 버린다. 그동안 광합성을 하여 만든 영양분은 땅속 비늘줄기에 저장하고 이듬해 봄을 기다리며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이러하기를 적어도 5~6년을 거듭해서 자라야 잎이 2장이 달리고, 그래야 꽃대를 올려 비로소 한 송이의 꽃을 피운다. 얼레지는 낙엽성 큰키나무 아래에 지피용으로 식재하여 꽃을 볼 수 있으나 워낙 성정이 까탈스러워 가꾸기 쉽지 않다. 또한 얼레지는 흉년에 구황식물로도 요긴하게 이용하였다. 봄에 새로 돋아나는 잎을 채취하여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독성을 우려내고 나물밥을 해 먹기도 하고 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또한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고 묵나물로도 이용하였다.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비늘줄기를 캐서 물에 씻은 다음 삶아 먹거나 불에 구워 먹기도 하는데 맛이 탁월하단다. 또한 비늘줄기에는 40~50%의 전분을 함유하고 있다. 강판에 갈아서 물에 담가 가라앉혀 전분을 얻는데 이것을 편율분(片栗粉)이라 한다. 이렇게 얻은 전분은 질이 좋아서 일반 요리에도 다양하게 쓰인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얼레지를 약재로 다양하게 이용한다. 잎을 짓찧어서 화상, 외상, 부스럼, 습진 등에 바르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비늘줄기는 건조하여 궤양성 위장병을 치료하는 건위제로 이용하고, 콩팥의 질병과 복통, 이질, 설사, 구토를 억제하는 데도 달여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 약재로 쓰거나 전분으로 식용한 얼레지의 비늘줄기(중국식물지에서 가져옴)

'얼레지' 나물 채취

어제 자생 히어리를 만나보고 싶어서 꽃동무들과 광덕산에 갔다. 산 속에서 나물 채취하는 부부를 만났다. 앞에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산나물을 채취한다. 뭘 채취했는지 궁금하여 보여 달랬더니 얼레지 잎이며 산괴불주머니, 피나물 어린 순도 보인다. 생계를 위한 방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분별한 채취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얼레지가 두 잎을 달고 나와 꽃을 피우려면 5~6년이 걸린다는데 잎을 뜯어가 버리면 어찌될까? 내년에 다시 잎이 나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광덕산 고갯마루 쉼터에서는 지금도 산나물을 판매한다. 두릅나무 순도 있고 얼레지 잎도 있다. 그렇게 산나물로 맛이 있고 몸에 좋다면 재배해도 좋을 텐데. 오늘따라 꽃이 핀 얼레지가 자꾸 눈에 밟힌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이호균 주주통신원  lee1228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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