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전쟁에서 촛불시위까지 시간 여행

- 들어가는 이야기

1894년 12월 18일 눈보라 치는 해남. 마지막 남은 동학 잔당을 쫓고 있는 우에하라. 석 달 전 경상북도 예천 소야 관동포를 친 뒤 반도 끝까지 샅샅이 쓸면서 내려왔다.

조선에는 큰길이 없다. 산 아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조붓한 길과 마을 안을 실핏줄처럼 잇는 골목길이 있을 뿐이다. 골목길은 징검다리처럼 마당을 밟고 요리조리 산자락으로 굽이친다. 조선인은 평생 마당을 떠나지 않고 골목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난리가 터지거나 화를 입으면 골목길로 이어진 숲으로 뛰어 들거나, 숲과 마을을 오가며 저항한다. 멀리 임진년에도 그러했다. 마당과 골목마다 모여 말을 퍼뜨리고 농악으로 일궈낸 신명으로 서로를 붙들고 힘을 불러 모았다. 동비들은 법소마다 외어야 할 주문을 붙여놓았다. 본영에서는 조선 동학당에서 통용되는 은어 13자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조사하고 동비들이 퍼뜨린 온갖 구호를 낱낱이 살피고 헤아렸다.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속이지 마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거만하게 대하지 마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마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어지럽게 하지 마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요절케 하지 마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더럽히지 말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굶주리게 하지 마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좌절시키지 말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억압하지 말라

하늘과 자연과 사람을 굴복하게 하지 말라

 

동비 우두머리 해월이 지었다는 십무천(十毋天)을 곱씹던 우에하라는 본영에서 받은 전보를 다시 펼쳐본다.

작전명1 - 燒光(소광)

상주-문경-충주로 병참로를 닦고 전신주를 가설하라. 모든 건설은 사로잡은 동비들을 내세워라.

 

1894년 6월 12일. 대본영은 부산에 1개 보병중대를 파견한다. 제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 준장은 바바마사오 공병소좌를 제1지대에 배치하여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성주, 추풍령, 옥천을 지나 청주까지 전선 가설을 맡겼다. 우에하라는 다께노우찌(竹野) 대좌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대구에서 상주를 톺아 문경을 넘어 수안보와 충주로 뻗은 길을 염탐했다.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는 소금배는 예천 풍양 삼강나루에서 끊겼다. 삼강나루에서 하늘재를 넘어 충주로 이어지는 길은 60리다. 하늘재에 올라서면 세곡선이 뜨는 충주 목계나루까지는 보부상 날랜 걸음으로 반나절이면 닿고도 담배 한 대 쉴 참인 거리이다. 전신주가 가설되는 곳은 곧 병참노선 길이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가장 빠른 길이어야 하고 가장 안전한 길이어야 한다. 물길이다. 조선의 물길을 타야한다. 물길은 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동비를 떼어놓기도 그만이다.

우에하라가 전신주를 세울 통로로 상주-문경-충주가 알맞다는 보고서를 지도와 함께 올린 지 나흘 만에 받은 전보 명령서이다. 대본영은 바바마사오 소좌에게는 전신주가설 실무지침을 따로 전달했다.

전신주는 조선인 집 마당을 가로 질러라.

조선인이 받드는 신목과 사당을 내려다보는 곳에 설치하라

하루에 10리 이상은 진군하지 말고 낱낱이 기록하라.

 

우에하라는 전신주를 가설하면서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1개 분대를 이끌고 조선 강과 숲을 샅샅이 헤집어가며 그렸다. 조선인들이 아끼는 비보림과 임수(수풀)를 찾아 기록하느라 동비토벌 본대와 닷새 시차를 두고 움직였다. 12월 18일에는 전남 해남에 이르렀다. 8월 28일 예천에서 출발한 지 열흘 빠지는 넉 달이 걸렸다. (계속)

 

편집: 양성숙 편집위원

김시열 시민통신원  abuk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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