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이 되어버린 브사야의 꿈

"브사야에요. 친구들은 '비' 라고 부르지요. 당신은 일본인인가요?"

늘 내가 앉아 데낄라를 홀짝거리던 자리에 오늘은 그녀가 먼저 앉아 있었다. 양주병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는데, 보관해 놓았던 것을 먹고 있는지 새 병을 땄는지는 모르되 혀 꼬부라진 소리로 보아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를 때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한국 사람인데 . . .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와서 . . .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일걸요?"

태국에서 힘든 시절을 보낼 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퇴근하면 늘 들르던,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아파트 근처에 있던 '바'였다. 어둡고 빨간 조명과 흐느적거리는 듯한 사람들, 평일엔 한적하지만 주말이면 가득차면서도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 . . . . 나지막한 노래 소리와 맑고 투명한 기타 소리. 그녀는 그곳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처음 갔던 날, 웨이터가 메모지를 갖다 주며 신청곡이 있으면 하라고 해서 그냥 별 생각 없이 '해 뜨는 집'을 적어 주었었다. 메모지를 건네며 쳐다본 무대에서는 자그마한 체구의,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브사야가 애잔한 목소리로 'The saddest thing' 을 부르고 있었다. 노래를 끝내고 메모지를 받아든 그녀가 내 쪽을 흘낏 쳐다보고 빙긋 웃었던 것도 같다.

돌아온 탕아의 노래 . . . 늘 애니멀스의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듣다가 섬세하고 애잔한 여자 목소리로 듣는 그 노래는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 . . 해 뜨는 집이 아니라 노을 속에 잠기는 해 지는 집으로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사람들이 잘 앉지 않는 구석진 내 자리에 앉으면 따로 신청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오늘은 늘 무대 한 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던 기타를 옆에 두고 술에 취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 인테리어 bizers.net 제공. 기억속의 장소와 가장 비슷한 분위기의 바. 조금 더 어두웠고 푸른색 계열의 조명은 없었으며 좌측 구석 쪽이 브사야가 노래를 부르던 무대를 떠 올리게 한다.

"오늘도 안 오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 . . 당신이 오면 그 노래를 불러주고 가려고 며칠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 . . 그러니까 이 술값은 당신이 내는 게 맞는 거예요 . . . 그리고 나는 . . . 처음부터 당신이 일본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취한 것이 맞았다. 나는 동의를 구하며 쳐다보는 그녀의 풀린 눈동자를 향해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파타야 출장 때문에 며칠 오지 못한 동안 브사야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할지, 친구 따라 푸켓에 가서 다이빙 샵을 해야 할지 . . . . 오늘 중으로 결정을 해야 하는데 . . .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네 . . ."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도 이런 바를 하나 가졌음 얼마나 좋을까요 . . . 저 쓰레기 같은 사장 대신 . . "

나는 처음으로 바 형태의 술집이 누군가가 운영하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이며,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곧 이어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이 ‘나이를 더 먹으면 이런 바를 운영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기타를 들고 무대로 가서 '해 뜨는 집'을 부르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목소리는 더 애잔했는데, 감정이입이 되어서일까 . . .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뉴올리온즈로 돌아가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집시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는 브사야의 꿈 . . . 언젠가는 나도 멋진 바를 가지고 싶다 . . . 는 내 꿈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앉았다.

그녀가 바를 그만 둔 후에도 몇 번을 더 갔으나 브사야가 없는 그곳은 이미 나에게도 그리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의 무대에 래퍼들과 재즈 밴드들이 번갈아가며 오르내렸지만, 모두들 자그마한 그녀가 꽉 채워주던 무대를 휑하게 느껴지게 만들 뿐이었다.

십 년 쯤 지나 아내와 함께 방콕을 방문했을 때 그 바를 갔었다. 그런 퇴폐적인 분위기를 혐오하는 아내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가 단골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브사야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가늘게 눈꼬리를 말아 올리며 혹시 뭐 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냐고 정색을 하는 데에는 실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담에 나도 이런 바 하나 해볼까?"

"하고 싶은 거 많아서 좋겠수 . . . 뭔 술장사가 하고 싶대? "

지금도 어디선가 해 뜨는 집을 듣거나 혼자 흥얼거릴 때면 내게 멋진 바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어디론가 떠난 브사야가 생각난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돌아서서 내게 묻던 그 말이 내 버킷리스트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 . .

" 죽기 전에 내 꿈이 이루어 질까요?" (계속)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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