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곳 김포로 이사 온 지도 3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어 공연히 이사 왔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마침 집 뒤에 산이 있어 등산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런대로 다행이었지만, 등산을 즐기지 않는 아내 한솔 선생은 무료하고 답답해했다. 그래서 아내는 얼마간은 매일 서울로 나갔다. 서울을 다녀와서는 입버릇처럼 늘 "여보, 괜히 이사왔나봐. 우리 서울로 도로 가요" 하고 졸랐다.

어느 날 우리는 동네에 장애인복지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노년엔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생각을 가졌어도 막상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방법을 알 수 없어 곤란하던 터였다. 그때 복지관에서 재능봉사자를 모집하는 공고문을 봤다. 우리 내외는 바로 복지관을 찾아가 등록했다. 나는 '의료봉사', 아내는 '서예봉사'. 2013년 9월에 시작한 봉사활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방진료실에서는 매월 둘째·넷째 주 화요일 오전 10시 ~ 12시에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방치료를 하고 있다. 10여 명의 지체장애인(중풍 6명, 교통 2명, 청각 2명)과 지적장애인(뇌막염 2명, 정신박약 1명이 매월 치료를 받으러 온다.

그동안 많은 환자를 만나왔지만, 장애인 환자만을 진료하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처음엔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막연했다. 그러나 진료에 임하면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됐다. 특히 지적장애인을 만날 때면 마치 눈 속에 핀 매화를 보는 듯한 신선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이번 달부턴 거동이 불편한 재가 장애인을 방문해 진료하기로 했다. 지난 3일이 그 첫날이었다. 우리 부부 내외는 한정은 복지사의 안내를 받으며 양곡에 거주하는 환자 집으로 찾아갔다. 나는 이동 중에 한 복지사에게 환자와 관련된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 환자의 가정환경, 상태, 종교 같은 것 말이다. 내 경험상, 종교를 알아두는 건 중요하다.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대화하기 쉽다. 환자는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마침 강원도에서 올라온 환자의 오빠도 함께 있었다. 그를 통해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환자는 10살 무렵까진 정상적으로 자랐으나, 어느 날 화재로 몸에 화상을 입고 놀란 뒤로 간질을 앓게 됐다고 했다. 환자의 손과 발에는 화상 자국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환자는 진찰이 시작됐는데도 간신히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복음 말씀을 외우자, 환자의 마음이 열렸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환자의 오빠도 ‘아멘’ 하고 기도했다. 우리는 다 함께 주님께 기도했다. 치료가 끝난 뒤 아내는 환자를 꽉 껴안았다.

양곡 방문 진료 후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복지관에서 아내와 함께 봉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누군가가  "선생님!" 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양곡에서 만났던 환자였다. "아니 어떻게 나오셨어요?" 우리 내외는 반가워하며 환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환자의 표정이 밝았다. 우리 내외의 마음 또한 즐거웠다. 봉사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봉사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동정은 교만을 부를 수 있다. 진정한 봉사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나를 낮추고 마음을 비울 때 내가 높아지고 마음에 즐거움이 찰 수 있다. 그러니 봉사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곧 나를 위한 것이다.

오늘도 아내와 나는 봉사를 마치고 복지관을 나와 집을 향해 걷고 있다. 따사한 봄볕이 우리의 등 뒤로 내려앉는다. 나는 이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아내가 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여보, 우리 이제 이사 가지 말고 여기서 오래 살아요." 그때 나무 위에서 어울리던 한 쌍의 새 중 한 마리가 나 대신 대답이라도 하는 듯 지저귀었다.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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