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68] 一字之師(하)

김동호 편집위원l승인2019.01.03l수정2019.01.04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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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튀김은 몇 번을 시도했지만 맛이나 생긴 모양이 돈을 받고 팔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우리가 먹어봐도 돈 주고 사먹을 맘은 생기지 않겠더군요. 광화문 길거리에서 사먹어 본적이 있는, 가늘게 썬 고구마 튀김을 만들기 위해서도 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며칠째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어느날,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까지 장사를 했지만 매상은 몇 십위엔 뿐이었습니다. 주류는 어묵튀김이었는데, 우선 강한 조미료 맛이 제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고구마튀김을 찾는 손님이 늘어가자, 친구에게 한 가지에 집중하자고 제안했지요. 매출이 낮아도 고구마튀김에 베팅하자고. 친구도 선선히 호응해줬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야채상점에서 고구마를 사와 잘랐습니다. 그 다음에 도매상에서 좀 더 저렴하게 고구마를 사왔고요. 매출이 100위엔 넘어갈 때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무려 20봉 넘게 팔았으니까요. 고구마를 자르고 튀기는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에 최대 300위엔 정도를 예측했는데, 한 달쯤 지나니 300위엔을 넘더군요. 사실 그 무렵 우리가 갹출한 원금과 수입 잔고가 거의 바닥으로 근근이 버텨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고구마를 가마니로 사오면서 원가는 더욱 떨어졌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점심도 안 먹고 달려가 고구마를 잘랐습니다. 어느 날 손목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만두 하나 사먹고 하자고 친구에게 10위엔 달라고 했더니 ”안 돼“라고 냉정하게 거절하더군요. 순간 ‘이xx, 지는 집이 가까워 점심이라도 먹었지만 나는 굶고 그냥 왔는데....’ 2-3일 지나서, 당시 싫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내 얼굴을 보고 친구는 ‘아차’ 했다 하더군요. 그러면서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이야기, 친구고 사업이고 돈이 투명하지 못하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해주었습니다.

밤늦게 정리하고 함께 나서면 저는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야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앓아누웠습니다. 4~5일 정도로 기억합니다. 친구도 문을 닫고 쉬었다고 생각했지요. 가서 보니 이 친구 하루도 쉬지 않고 혼자서 고구마를 다 자르고 튀겨서 팔았습니다. 그동안 칼질을 나 혼자 해서 나름 기술 습득이 됐는데, 이 친구 급하니깐 고구마를 손가락 굵기로 대충 자르고 튀겼습니다. 매일 둘이 있다가 혼자서 튀기니깐 나의 안부를 묻고, 단골들이 들어와 대신 칼질도 해줬다고 하더군요. 또한 다음날도 장사를 해야 하니깐 저녁에 초벌로 튀겨서 건져놓고 갔답니다. 다음날 살짝만 더 튀기면 완성이 되니깐 튀기는 시간도 줄고, 문을 열자마자 곧장 팔수가 있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나도 굵게 자르고, 저녁에 초벌로 튀겨 놓고 가면서 매출이 계속 늘어나더군요. 500, 600, 800위엔으로. 중학생들이 수업 끝나면 몰려와 화구 3개에 3줄로 서서 튀기기 바쁘게 집어갔습니다. 얼마 있다가 여고생들이 또 줄을 섭니다. 화구 3개에서 튀기는 고구마 냄새가 골목으로 퍼져나가고, 학생들은 줄을 길게 서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고구마도 우리가 시키면 차로 배달해줬습니다. 하루에 한 가마를 잘랐는데, 매출이 1,000위엔 넘어갔지요. 200봉 넘게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방학이 되면서 하루 종일 있어봐야 2~30위엔 팔려서 우리도 문을 닫았습니다. 친구는 내가 투자한 원금을 돌려주고, 자기는 화구와 솥을 처분하면 손해는 아니라고 하는데, 이 친구가 손해를 감수하였을 것입니다.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연락을 하며 지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내려와 등산도 하고요. 겨울방학에는 아애 짐을 챙겨와 동해대학교 기숙사 내방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이 친구 사촌형이 대기업 무역부에서 근무를 했는데 대만 파트너에게 친구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토요일 하루 회사에 나가고 월급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는 내가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이야기들을 의식적으로 많이 해줬습니다.

친구가 토요일에 나가는 회사 사장이 한국에서 처음에 마라톤 타자기를 수입했답니다. 70년대, 80년대는 대만의 황금기였지요. 모든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어 해외에 팔기 시작하던 시기로 아시아 네 마리 용중에 선두를 달리던 때라고 했습니다. 상업고등학교나 작은 회사들도 타자기가 필수여서 사업이 번창했답니다.

사장은 100원을 벌면 혼자 다 먹지 않고 80원은 판매상에게 다시 돌아가게 사업을 한답니다. 마라톤 타자기가 한국산임에도 판매상들은 가능하면 마라톤 타자기가 좋다고 권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독일제라고 하거나, 혹은 부품이 독일제라며 품질이 좋다고 하니 당연히 마라톤 타자기가 대만 시장을 석권했지요.

그러다 팩스가 출현하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타자기 사업도 내리막을 걷고, 사장은 타이베이 중심부에서 점점 외곽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다 비디오테이프 사업을 시작합니다. 당시 노래나 비디오테이프는 일본 TDK 제품 천하였습니다. SK 제품도 조금 보였고요. 사장은 LG에 가서 OEM 생산을 합니다. 상표를 華王(화왕)으로 바꿔서 수입한 후, 동일한 방식으로 이윤의 80%를 판매상이 챙길 수 있게 해줍니다. 당연히 판매상들은 화왕이 최고라고 선전을 하지요. 대만사람들은 신용을 지킵니다. 화왕을 많이 팔면 사장이 자기들 확실하게 챙겨준다는 믿음이 있지요. 화왕이 날개를 답니다. 일주일이면 몇 개의 컨테이너가 들어와 대만 전역에 깔리지요. 다시 타이베이 중심으로 회사를 옮기고, 자기가 살던 집은 친구 H가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살게 해줍니다. 저도 당연히 그 집에 여러 번 갔지요.

친구는 졸업 후 매일 오후에 사무실로 출근을 합니다. 또한 사장의 배려로 자기 회사를 만들어, 자신의 사업을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친구와 너무 잘 어울리는 밝고 아름다운 부인과 귀여운 딸이 제가 가면 항상 반겨주었습니다. 진심으로 천년만년 행복하리라 의심치 않았지요.

▲ 연꽃이 내게 준 그리움      사진 : 최호진 통신원

세파에 흔들려도 인연의 꽃은 아름답습니다.

2002년경으로 기억합니다. 한 선배가 이 친구의 믿을 수 없는 소식이라며 제게 확인을 해왔습니다. 한동안 망연자실했습니다.

한국에 와 있는 부인과 연결되었고, 오랜 기다림 후 오라고 하는 날 저녁에 집으로 방문했습니다. 중학생인 딸과 함께 모녀가 맞이하는 친구 첫 기일이었습니다. 대만에서 친구가 쓰러지고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정신없이 한국에 와서 입원을 하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좋은 친구로 나를 기억해준 친구덕분에 첫 기일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딸은 한국 화교학교로 전학을 시켰는데 월등한 실력으로 적응에 전혀 문제없다고 하더군요.

엄마와 딸이 그때까지 친구의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동호씨는 H가 죽었다는 생각이 드세요? 전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지금도 문 밖에서 웃으며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고, 조금 있으면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무심하게 허공을 가르는 두 모녀의 눈과 입가의 쓸쓸했던 미소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슬픈 사람의 얼굴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후로 대만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혹시 도움이 될까 연락을 했지만 만나지는 못했지요.

어느 날 저녁식사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딸은 의지가 되는 기둥같이 보였고요. 부인이 자기들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H가 남긴 유산과 다른 도움으로 작은 상가건물을 매입하기로 계약했다고. 자기 두 모녀는 잘 살 거라고. 그리고 나를 보면 H가 더 생각이 간절해진다며 연락을 안했으면 하더군요.

나에게 많은 가르침과 추억을 남긴 친구는 마흔 중반, 믿을 수 없는 나이에 곁을 떠났습니다. 一字之師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다 쓸 수 없지만, H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스승이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염두에 두었던 건, 이익은 여럿이 나눠야한다는 친구의 조언이었습니다.

편집 :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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