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인헌고 사건

-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따른 민주시민교육 시급하다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19.10.28l수정2019.10.3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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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 인헌고등학교에서 '학생수호연합' 일부 학생들이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지 말라며 기자회견을 자청한 적이 있다. 학교행사나 교과수업에서 특정 사상을 강제하여 '사상학대'를 당했다는 주장이다. 지난 17일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한 교내 마라톤 행사에서 학교가 반일구호를 강요했다는 주장이다.

이 사건은 일부 학생들의 주장이 진실인지 그 사실여부를 떠나 한국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순식간에 보수(?) 유튜버들이 학교 앞으로 몰려왔고 보수(?) 단체회원들이 학교 앞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교육환경이 일순간 혼돈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갑자기 '전교조=빨갱이' 팻말이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 주요 일간지엔 기다렸다는 듯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약칭)를 비난하는 기사나 칼럼이 나오기도 했다.

▲ 10/23일 인헌고 앞에서 보수(?) 단체 회원들이 <전교조 해체>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다행스러운 것은 해당학교에서 학급자치회와 대의원회의를 통해 학생들 스스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번 주에 '학생 공개토론회'를 개최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점이다. 이는 혁신학교다운 문제해결 과정이자 건강한 모습이다.

이제 외부 어른들은 아이들이 내린 결정과 문제해결과정을 지켜볼 일이다. 쓸데없이 인헌고 사건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하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그것은 아이들 학습권을 침해하는 매우 나쁜 행위로 어른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해당학교는 이른바 혁신학교로서 진보교육감이 지향하는 '민주시민교육' 실천학교이다. 아이들 인격을 존중하고 일상에서 학교구성원들이 인격적으로 동등한 관계 맺기를 실천하는 학교이다. 이를 통해 학교현장에 민주주의가 흘러넘치도록 하려는 교육철학이 담긴 학교이다.

혁신학교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암기하는 전통적인 교실수업이나 전통적 학교 개념과 다르다. 혁신학교는 학생들 스스로 자발적인 활동에 교육의 기반을 두고 있다.

한 마디로 학생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속에서 수업동기를 부여하고 토론과 모둠별 활동, 자발성을 중시하고 권장한다. 따라서 혁신학교는 교육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교육개혁의 모델이 되는 학교이다. 아이들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문제와 갈등이 발생하면 대화와 설득, 토론을 통해 해결하려 노력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성숙한 과정을 중요한 교육활동으로 추구한다. 그런 이유로 혁신학교에선 교사든 학생이든 토론이 일상화되어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최적의 방안으로 대화와 토론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혁신학교는 민주시민교육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민주학교'의 전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교사의 일방적 지시와 수동성이 몸에 밴 전통적인 학교에선 아이들이 문제제기하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혁신학교에선 자신의 사고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성을 존중받기에 아이들은 문제제기가 낯설지 않다. 이번 사건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표출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전통적인 일반학교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번 사건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싶진 않다.

한편, 한국사회는 사회갈등지수가 상당히 높은 국가에 속한다. 한국경제연구원(2016)에 따르면 OECD 가운데 한국은 멕시코, 터키 다음 세 번째로 사회갈등지수가 높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17)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회통합지수는 거꾸로 OECD 회원국 가운데 29위를 차지했다. 거의 꼴찌 수준이다. 오늘날 광화문과 여의도, 서초동에서 매주 열리는 대형집회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갈등에 따른 국민 1인당 손실액은 연간 900만원에 이르고 국가 전체로 246조원에 이른다는 연구추정치도 있다.

문제는 다수 의견이 지배적일 때 자신의 다른 생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스템의 부재 내지 교육환경의 결핍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치관이 지배적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공간에 살지만 가치관의 차이가 확연하고 갈등양상이 잠재돼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구나 성장 과정에서 배움의 도정에 있는 학생들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바람직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이들을 억압하지 않아야 하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추구하고 결정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면 된다. 그게 교사의 역할이자 학교의 존재이유이다. 이점에서 인헌고는 그 역할에 충실했다고 본다. 학생수호연합 일부 아이들의 태도가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반대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물론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은 '사회적 개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숙한 시민성(citizenship)이 필요하다. 성숙한 시민성을 가늠하는 표준은 자율과 자존감, 그리고 연대와 도덕성이다. 자율과 자존감은 학생 개인의 내적 지위를 높여준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사회에 대한 사랑(연대)과 도덕성(정의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할 때 건강한 어른의 조건인 성숙한 시민성을 기를 수 있다.

이를 위한 교육활동의 첫 단계가 다음 세 가지 교육 대원칙이다.

첫째 사회적 현안이나 쟁점이 되는 논쟁 사안을 교실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논쟁성 재현 수업'이 필요하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사회현안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자율에 기초한 자주적 인격형성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인격은 공동체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사회문제를 외면하는 이기적인 태도이다. 그 다음 나쁜 인격은 공동체 문제를 자신의 특정 이익을 위해 왜곡시켜 선동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학생 또한 '사회적 개인'으로서 공동체 문제, 바로 사회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하며 토론과 논쟁을 통해 사고의 기반을 탄탄히 다져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교사와 학교를 포함해 외부로부터 강제된 '주입이나 교화의 금지'이다. 비록 선한 가치일지라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 하거나 선택적 가치를 강요할 때 그것은 아이들 사고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방해하고 미숙한 인격을 양산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주적 인간으로서 비판적 사고를 멈추게 만들고 비판적 지성이 실종된 사회를 낳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근대적 규범에 익숙한 인간형을 모범적인 학생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낡은 방식이자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학생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이해관계가 반영된 정치적 실천 능력을 지향한다. 즉, 학생 자신의 관심과 이해관계가 고려된 정치적 행위능력을 강화하도록 교육과정이 운영돼야 한다.

이상 세 가지 원칙을 '보이텔스바흐 합의'라고 일컫는다. 1976년 독일 남부에 위치한 소도시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서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좌우학자들이 모여 치열한 토론 끝에 정리한 교육 대원칙이다. 최종 합의문에 이르진 못했어도 좌우 정치교육학자들이 나름 수긍하고 인정한 교육지침이다.

2차 대전 이후 민주시민교육을 지향하는 독일 교육계 노력의 산물이자 1970년대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 속에 탄생시킨 교육 대원칙이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이후 독일 정치교육뿐만 아니라 공교육활동 전반에 걸쳐 교육 대원칙으로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내용이다.

우리나라도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정신을 교육청 민주시민교육진흥법 조례로 구현하고 있다. 2015년 경기도 교육청을 첫 시작으로 전북-충북-충남-전남 교육청을 비롯해 광주-강원-인천교육청을 거쳐 2019년 제주교육청에서 민주시민교육 진흥 조례가 제정돼 시행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역시 2018년 민주시민교육진흥법이 제정되었고 오늘날 진보교육감 중심으로 10개 광역시도 교육청에서 법안이 마련돼 있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제정한 '민주시민교육진흥 조례'(2018년 1월) 제4조를 살펴보자.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정신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각 시도 교육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동소이하다.

제4조(기본원칙) 학교민주시민교육의 기본원칙은 다음 각 호와 같다.

1. 「대한민국헌법」이 규정한 가치와 이념을 계승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

2. 우리 사회에서 논쟁적인 것은 학교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사적인 이해관계나 특정한 정치적 의견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3. 주입식 방식이 아닌 자유로운 토론과 참여를 통한 교육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4. 학교 구성원 누구나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보편적 접근성은 보장되며 자발적인 참여를 지원한다.

문제는 학교현장에서 민주주의가 흘러넘치도록 이를 시행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진보교육감의 정책의지가 학교현장에 반영되고 실천되기 위해선 단위학교 학교장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학교정책이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실천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아이들을 좀 더 성숙한 시민 역량을 갖춘 민주시민으로 길러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시민은 저절로 탄생하지 않았다. 학교교육을 통해 민주시민으로서 자질과 지식을 습득하고 가치와 태도를 익힐 때 탄생할 수 있다. 오늘날 학교 민주시민교육을 앞서 실천하고 있는 북서유럽 국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해 왔다.

영국, 프랑스, 핀란드, 아일랜드, 크로아티아는 민주시민교육을 독립된 교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 스웨덴, 벨기에는 통합교과 내지 범교과간 연계 형태로 교육과정을 법제화하여 실천하고 있다. 그들 국가의 공통점은 민주시민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규정해 학교교육과정에서 이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번 인헌고 사건은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기초한 민주시민교육이 학교현장에 절실히 필요함을 가르쳐준 사건이다. '학생수호연합' 소속 학생들을 일베로 몰아가거나 정신상태가 이상한 아이들로 선을 긋는 것은 매우 비교육적이고 위험한 발상이다.

▲ 10/23일 인헌고 앞에서 인헌고 <학생수호연합> 학생들이 정치편향, 사상독재를 주장하며 발언하고 있다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자율과 존중, 그리고 연대(사랑)와 정의를 추구하는 도덕성이 교육의 목표로 추구되고 아이들 또한 이에 기초해 대화와 토론을 거친다면 보다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혁신학교에 대해 근거 없이 이념의 딱지를 붙여 사갈시하는 일부 언론과 보수(?) 단체의 태도를 경계한다. 혁신학교는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높이고 존중과 배려의 미덕을 실천하는 학교이다.

혁신학교에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전교조 교사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참교육을 실천하는 혁신학교에 대해 '좌파교육'으로 이념적 색깔을 덧씌우고 '전교조 = 빨갱이'로 비난하는 것은 성숙한 자세가 아니다.

모쪼록 이번 인헌고 사건을 계기로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교육의 대원칙으로 제도화되고 학교현장에 민주시민교육이 전면적으로 도입,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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