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산에서 취사가 허용되지 않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야영과 취사가 가능했습니다. 당시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값싼 가스버너가 다양하게 생산되었지요. 새로운 형태의 가스버너가 나오면 거의 모두 찾아서 수출하였습니다.

그 중 첫 거래를 하는 사장에게 오더를 주었더니 부품 조달하느라 자금이 달린다며 일부 결제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빨리 보내야 시장을 선점하니까 원하는 돈을 결제하고 속히 납품하라고 했지요. 하지만 약속한 기일을 넘기며 여러 이유를 댑니다.

나중에 대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오더한 물건이 이미 대만에 풀렸다고. 알고 보니 저에게서 선금을 받았으니 제 오더는 확보되었다고 생각하고 저에게 보낼 물건을 대만의 다른 업자에게 먼저 주었던 것이지요.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겨우 물건을 받아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그 이후에 그 버너 더는 나가지 않았고 그 공장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나의 경험으로 이익만 탐하거나 편법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업체는 얼마 못 버티더군요.

伍 先生은 등산장비 이외의 사업거리를 찾아 저를 돕겠다며 많이 노력했습니다. 대만에 간다고 연락하면 주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식사자리를 마련합니다. 원사, 원단, 가죽제품, 중고기계 등등 많이도 만났지만 한두 번으로 끝나거나 시작도 못했지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 또한 있는 것이 세상사. 매월 한 컨테이너씩 나가던 물량이 거짓말처럼 뚝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96년 3월경 중국이 대만해협을 봉쇄합니다. 그 전 해에 대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 의회의 결의안 통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 중국이 군사행동을 취합니다. 95년 7월 미사일 발사 실험과 동시에 대만 맞은편 푸젠(福建)성에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킵니다. 96년에 있을 국민당 리덩후이의 재선을 막기 위한 작전이었지요. 긴장관계는 갈수록 증폭되다 1996년 3월 8일부터 15일까지 아예 해상을 봉쇄하고 가오슝항 인근 50여 Km 지점에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대만은 12해리 안에 미사일이 떨어지면 즉각 응전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러면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맞섭니다.

대만해협을 지나던 모든 선박과 항공이 갑자기 우회하느라 엄청난 혼란이 야기됩니다. 미국 클린턴 정부는 월남전 이후 최대의 해군력을 대만 인근으로 집결시킵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선거 날까지 300대 이상의 전투기와 구축함 잠수함을 동원한 상륙작전 훈련을 하며 압박했습니다. 결과는 중국의 의도와는 달리 국민당 리덩후이가 중국에 맞장 뜨는 지도자로 인식되며 인기가 급상승 무난하게 재선에 성공합니다.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이 되자 대만은 공황상태에 빠지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재산을 처분하여 이민을 떠납니다. 당시 가장 많이 간 곳이 캐나다 밴쿠버와 호주 브리즈번입니다.

▲ 사진중앙 : 밴쿠버에 가족들 남겨두고 현재 타이난 거주 중인 런런!
▲ 2004년 1월 호주 브리즈번에서 만난 화교 상인들. 왼쪽 두 번째. 가오슝과 일본등지에서 사업하며 한국에도 몇 번 들렸던 지인 조셉 꿔!

반년 넘게 미사일 날아다니고 미국 항모 들어오고 전투기 뜨고 내리는데 누가 산에 가고 바다에 가겠습니까? 그렇게 끊어진 수출은 2년여 지나 한국 아이엠에프 상황이 되자 원화 급락으로 한 컨테이너 더 보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냥 몇 번 도와주는 정도로 등산장비 수출은 막을 내립니다.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겠지만 저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저평가된 대통령이 김영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집권보수당이어서, 그리고 김영삼이니깐 할 수 있었던 일이 바로 군부 실세들 모임인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전면실시였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감방에 보낸 것도 김영삼만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후진적인 군부쿠데타의 위험성을 없앴고, 대기업과 부패관료를 처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역업무도 많이 간소화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생활용품 검사라는 것도 없어졌고, 서류도 줄어든 거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장 반가웠던 정책은 세무서 직원의 업체 방문 금지였습니다. 지금 사업을 하는 분들은 무슨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냐고 의아하겠지요. 세무서직원의 업체방문은 보통 골치 아픈 상황이 아닙니다. 당시는 세무행정이 자리를 잡지 않았던 어수선한 사회였지요.

무허가 공장들이 아주 많았고, 매장에서는 매출을 당연히 줄여서 세금을 피했습니다. 세금 다 내고 사업 못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했습니다. 저는 모조리 수출하니까 매출은 100% 노출이 되는데 거래하는 대부분이 무허가라 세금계산서를 못 끊었지요. 항상 매입이 부족합니다. 1,000만 원어치 구매하여 1억에 수출했다고 할 수도 없으니 근사치에 가깝게 매입자료를 구해야합니다. 어떤 공장은 어렵게 세금계산서를 구해다 주었고, 그도 아니면 저도 나서서 자료를 사왔지요. 사업자등록이 되어있는 업체에서는 영세율(부가세 제로)로 구입해서 수출하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분기마다 부가세 환급을 받게 됩니다.

환급금액이 크지 않을 때는 신경 쓸 일이 아닌데 갈수록 금액이 늘더니 어느 날 구로세무서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주변 사람들이 앞으로 안 시달리려면 봉투를 준비했다가 자알(?) 주라고 귀띔을 하였습니다. 봉투 안 주었다가 세무검사 며칠 받고 문 닫았다는 회사명도 들먹이며.

고민이 많았습니다.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봉투, 뇌물 이런 부정적인 짓거리를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과, 한 번 뇌물을 건네면 그 후임에게 명단이 내려간다는 낭설과 후한. 결론은 봉투 없이 가자였습니다.

작은 13평 오피스텔에 전세로 입주했던 시절입니다. 비교적 초기라 직원도 없이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할 때였지요. 수출한 자료 파일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더니 약속한 시각 즈음해서 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리고 꺼벙한 인간이 빼꼼히 문을 열고 나타나자, 작고 나이 든 세무서 직원이 위아래 훑어보며,

“사장(님?)입니까?”

“네!”(어정쩡한 대답)

“우리 구로세무서 관내 업체 중에서 부가세 환급이 두 번째로 많아 어떤 회산지 확인차 방문했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담당 공무원은 내놓은 음료도 안 마셨던 듯합니다. 수출 서류도 살펴보지 않았고요. 좁은 사무실에 살림을 함께하는 공간임을 눈치챈 듯. 오히려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생은 젊었을 때 하는 거라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세무 관련해서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찾으라고 명함인가 전화번호인가를 주고 갔습니다. 그 이후 세무서에 갈 때마다 도움을 받았습니다.

세무서 직원 업체방문이 사라진 시기가 바로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으니 개인감정이 더해져 높게 평가해도 이해하소서!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7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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