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야기 93] 대만 사람과 사업하기(JIE WANG-3)

김동호 편집위원l승인2020.06.25l수정2020.06.25 17:53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Mr 정의 스틸 볼 사업은 자본만 뒷받침되면 나름 손쉬운 업종이었습니다. 녹 방지 처리만 하면 수십 년 보관도 가능하고, 원자재 값이 올라가면 물건 값도 덩달아 오르지요.

▲ Mr 정이 새로운 사업으로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한 후의 모습

볼이 필요한 공장에서 주문하면 수량을 늘려 수입한 후 납품하고 나머지는 재고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재고 자산은 소량 주문이 올 경우 더 많은 이익을 붙여 팔기에 창고에 있으면 그게 곧 재산이고, 볼이 다양할수록 재산 가치도 높아집니다.

부인이 탈세로 Mr, 정을 고발하고 이혼할 무렵, 회사 경리를 부인이 보며 오랫동안 준비하고, 처남이 영업하고 있어서 타이베이 회사와 주요 창고의 재산은 빼돌릴 수가 없었지만, 가오슝(高雄) 항구 부근 창고에 있던 재고는 종리(中壢)로 몰래 옮겼습니다.

종리 창고에 갔을 때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와 재고 정리를 하고 있더군요. 관리가 잘 못된 제품은 녹도 제거하고 다시 포장도 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엄마를 선택하였고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대만 사회에서 좋아하는 말 중에 「以人爲本(이인위본)」이 있습니다.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인본교육이란 말로 쓰기도 하고, 경영 현장에선 사람중심 경영이란 말로도 쓰지요.

저도 이 「以人爲本」이란 말을 좋아해서 그런지 대만사람과 유대감이 높은 듯합니다. 저는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간도 신의 도구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지요.

Mr 정이 비록 회사는 잃었어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성향이라 기존 거래처에서 지지하며 거래를 유지하여 재기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고만 가지고 하는 기존의 사업은 한계가 있다고 보고, 경험이 축적된 스틸 볼 업종에 한 공정 더 해서 새로운 사업을 합니다.

상해와 절강성 주변에는 스틸 볼 생산 업체와 베어링 업체가 많아 저도 여러 번 갔었지요. 그중 한 베어링 공장과 협업을 합니다. 공장이 가지고 있는 기존 사이즈 이외의 신제품 베어링은 Mr 정이 투자하여 최소수량만큼 생산하고, 그 제품의 소유권은 Mr 정이 소유합니다.

구르거나 움직이는 거의 모든 제품에는 베어링이 들어갑니다. 핸드폰의 진동도 속에 작은 베어링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볼의 소재도 바닷물에 부식이 안 되는 스테인리스 볼, 제약회사와 같은 곳에서 쓰는 세라믹 볼, 구형 볼 대신 한 방향으로만 구르는 니들 볼 등 소재와 형태 크기에 따라서 베어링의 가짓수는 수천 가지가 넘어가지요. 아주 작은 베어링도 있지만, 주차장과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기계에 들어가는 베어링은 혼자 들지도 못합니다. 속에 들어가는 볼은 주먹보다 크더군요.

신제품을 개발하는 연구소나 공장에서 몇 개의 베어링을 Mr 정에게 주문합니다. 어떤 경우는 자체 개발을 하지만 대부분은 타사의 제품을 들여와 외형만 약간 바꾸고 모방품을 만들지요. 그 때 동일한 크기와 형태의 베어링을 구해 시험 제품을 생산합니다.

그럴 경우 마침 재고가 있으면 원가의 백배를 받아도 됩니다.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더군요. 정작 돈은 정식 발주가 나오면 벌어들입니다. 완구나 히트치는 제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오더가 따라온다고 합니다.

고객이 요구하는 베어링이나 시장성이 있는 새로운 베어링을 계속 만들어서 종류를 늘렸습니다. 몇 년을 끊임없이 재투자를 하자 그 회사에서 생산 가능한 베어링 종류가 수백 가지가 더 늘어납니다.

나중에는 독일과 일본의 가장 큰 베어링 회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다양한 종류의 베어링을 생산하는 회사로 발전합니다.

군에서 제대한 아들이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아버지 사업을 도왔고, Mr 정은 상해와 대만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더군요.

2010년으로 기억합니다. 중국 심천에 살던 무렵 아들 결혼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회사 경리를 맡아 일을 보던 똑똑한 여직원이 마음에 들어 아들에게 결혼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나이는 아들보다 연상인데 아주 유능하다고 며느릿감 자랑이 여간 아니더군요. 함께 고생하며 잘 자라 아버지의 듬직한 후계자로 성장한 아들이 고마워 결혼식에 갔습니다.

결혼식에서 혼주 인사하러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돌아서는데 얼굴이 벌게지더군요. 한두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땀과 눈물이 얼굴 전체로 번지더니,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억눌린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나중에는 “꺼억 꺽~~” 통제 불능으로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모두가 그저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요. 몇 분인가 지나서 흐릿하게 “깐 시에(感謝:감사합니다)” 한마디 겨우 하고 내려왔습니다.

▲ 결혼 후 3년 정도 지났을 때 대만을 방문하였더니 아들 부부도 나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손녀는 며느리 친정어머니가 봐주고 며느리는 회사일에 전념.

대만 이야기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이 장면의 주인공이 Mr 정입니다.

6년 전쯤 대만으로 이주를 결심하고 만났을 때는 예쁜 손녀를 자랑하며 그동안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제대로 규모를 갖춘 1, 2층 창고에선 지게차가 분주하게 이동하고, 사무실도 훌륭했습니다. 아들도 경영인으로 틀이 잡혔고, 60대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는 따뜻한 심성이 말끝에 묻어나옵니다. 또한 아들 내외와 함께 거주하는 집도 보여주었습니다. 중국 상해에도 사무실과 아파트를 마련했다고 하는 데 그곳은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만에 이주하면 가까운 곳에 살자며 집도 알아봐 주고 주변 골프장도 함께 찾아갔었지만 전 남쪽 타이난(臺南)으로 내려왔습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78@gmai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동호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짱아치 2020-06-25 20:55:14

    오늘도 흥미잔진한 한겨레 연재소설 읽듯이.. 계속 화이팅입니다~신고 | 삭제

    • 상도 2020-06-25 19:02:50

      사람이 가는 길을 인도라 한다면
      상업이 가는 길은 상도라 하겠지요.
      어느 길이나 이미 나있는 길도 있지안
      가야 길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세상 살이 길 중
      상도만큼 재미난 길도 없을 것입니다.
      즐거운 인생이네요.신고 | 삭제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주주커뮤니케이션팀  |  전화 : 02)710-0124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이상준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상준
      편집위원 : 김경애, 김국화, 김동호, 김미경,김태평, 서기철, 심창식, 정혁준, 허익배   |  객원편집위원 : 김혜성, 박춘근, 박효삼, 안지애, 양성숙, 최성주, 하성환
      Copyright © 2020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