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가로수는 절로 독기를 내뿜으며 살아간다

풍산역(경의선) 가는 길에 작은 공원이 있다. 내가 날마다 지나치는 곳이다. 공원이라기보다는 자그마한 쉼터에 가깝다. 주변은 온통 상가로 둘러싸여 있다. 좁은 골목에 치킨집이 일곱이요 커피집이 다섯이다. 1층에 있는 먹는 집만 둘러보아도 빵, 족발, 생맥주, 수제 맥주, 양꼬치, 삼겹살, 칼국수, 초밥, 분식, 김밥, 생선회, 돈가스, 해장국, 밥집, 장어구이, 중국집, 일본 술집 등이 즐비하다. 공원으로부터 모두 반경 50 m 안에 있는 곳이다. 화장실은커녕 분수, 조각, 매점, 음수대, 유희 시설 하나 없고 관리사무실은 물론 이렇다 할 나무 한 그루도 없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없다. 군데군데 긴 의자가 두세 개씩 놓여 있고 도롯가 그늘막(pergola)에는 ㄷ 자 형태로 의자가 놓여 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앉아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정담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공원은 주민들보다는 주로 상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다 가는 곳이다.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자리엔 쓰레기가 쌓인다

 

그날따라 눈에 거슬렸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너저분했다. 무수히 많은 담배꽁초와 술병, 깡통, 종이컵, 우유갑, 과자봉지, 비닐봉지, 휴지, 물티슈... 아침저녁으로 날마다 오가는 곳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왜 그날만 그랬겠는가.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자리엔 늘 쓰레기가 쌓인다! 쓰레기통도 보이지 않겠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서로를 감춰 줄 테니 간밤에 거리낌 없이 버리고도 남지. 꼭두새벽에 그곳을 지나간 내가 잘못이다. 청소하는 이보다 먼저 지나간 탓에 눈에 띄었을 뿐.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줍고 쓸고 담는 이가 있어 쾌적한 거리와 공원이 유지된다는 것을.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렇다. 누군가는 어지럽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치운다. 어지럽히지 않으면 치울 일 없으니 역설적이지만 어지럽히는 게 일자리를 보전해 준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쓰레기를 주웠더니 어디선가 나타난 이가 그것을 낚아채면서 남의 밥줄 끊지 말라고 쏘아붙이더란다. 프랑스에 다녀온 친구가 아주 오래 전에 한 말이다. 가 보지 않았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른다.

 

꽁초를 버리는 사람 사이에도 격이 있다

 

시청역 근처 서울상공회의소 앞길이다. 보이는 식당마다 맛집인가 보다. 양질의 저렴한 구내식당 – 내가 보기에 – 을 마다하고 많은 사람이 더운 날 외부로 나가 줄을 서서 먹는다. 그렇게 점심을 먹은 이들이 들르는 곳이 또 있다. 이곳 또한 사람들이 제법 쏠려 있다. 커피 들고 담배 물고 화단가 길거리에 줄지어 선 것이다. 사방에 금연을 알리는 표어가 보인다. 알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호소문에 가깝다.

‘금연 구역’
‘담배 연기 싫어요’
‘상습 흡연으로 인한 민원 다발 지역’

모두 3종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서울 중구보건소 명의로 벽 곳곳에 걸려 있고 땅바닥에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다. 물론 이를 눈여겨보는 이는 거의 없다. 무슨 억하심정일까? 바닥에 붙어 있는 ‘호소문’에는 보기 좋게 담뱃불로 지진 구멍들이 선명하다.

▲ 서울상공회의소 앞 길에서 본 금연 호소문

 

아무리 용심을 부리는 자들이라도 감히 대로변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작 캄캄한 밤, 으슥한 골목길에서 얼굴을 숨기고 빨았다. 그러던 아이들이 어찌 저리도 당당하게 한길을 점령하고 말았을까?

그 옛날, 독사 같은 학생부장은 쉼 없이 교정을 돌아다녔다. 화장실에서 교문 밖 담밑까지 뱀눈을 희번덕이고 코를 벌름거렸다. 이사도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돌아다닌다고 해서 붙여 준 별명이다. 바지 주름을 잡고 모자에 각을 세워도 잡아가고,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바리깡을 들이댔다. 제복은 자유를 억압하고 사유의 획일화를 강요했다. 이사도라는 일제 잔재인 일사불란을 숭배했고 아이들은 생각 없는 마루따로 성장했다. 누구도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적 없지만 그는 스스로 ‘정의의 사도’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은 자’에게는 ‘(정신)차렷!’이란 구호와 함께 가혹한 사형(린치)을 가했고 학생의 아비도 어미도 불려다니면서 굽신거렸다.

그날은 정말 재수가 없었다. 킁킁거리며 다가선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친구가 빨던 꽁초를 받아 막 한 모금 빨려던 참이었다. 머리카락 거머잡힌 채 개처럼 끌려간 그는 정강이를 까이고 예의 ‘빳다’를 몇 대나 맞았는지 모른다. 그러고도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이사도라는 한 손으로 귀를 잡고 사정없이 싸대기를 갈겼다. 담배를 씹듯이 꼬나물면서 한소리까지 했다.
“이 쌔끼들, 뼈 녹는다 안 카나! 마빡에 피도 안 마른 자석들이.”
사내 대 사내로서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었다. 그들은 이를 갈았다.

교복을 벗고 성인이 되면서 자유를 만끽한 나머지 방종에 빠졌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면서부터 내 세상을 만났다. 나 보아란 듯이 대낮에 한길에서 꼬나물었다. 꽁초는 스스럼없이 던지고 누군가는 게임 삼아 하수구를 향해 슛을 날렸다. 어찌 보면 이렇게 대담한 행동의 연원은 그 독사 선생한테 있는지도 모른다.

▲ 좌측부터 서울상공회의소 앞, 재떨이로 변한 고양시 중산동의 도로 화분

시청역 앞,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이다. 촌스럽게 흡연방을 찾는 이는 없다. 정장한, 서울의 젊은 한량들은 당당하게 한길가에서 담배를 피운다. 천연덕스레 서울을 들이마신다. 금세 담배 연기로 자욱해진다. 저들이 들이마신 서울은 저들의 오장육부를 한 바퀴 돌아 이내 다시 서울을 누빈다. 저들이 내뱉는 ‘서울’ 속에는 그 독사 선생을 향한 모진 독기를 포함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각종 노폐물이 보태진다. 맘껏 내뿜는다. 한 모금 남김없이. 그래서 서울은 진드기 같은 코로나가 사라지더라도 1급 방진 마스크나 KF94가 필수품이다. 그러잖아도 칙칙한 서울은 이 더운 여름, 정장 입은 젊은 한량들에 의해 제빛을 잃어간다. 담배 연기가 어지럽게 춤을 춘다. 연기 따라 사람끼리 흑백 논리가 난무한다. 희끄무레한 회색 도시로 변하고 있다.

▲ 신도림역에서 서울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이동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날 서울 전역 실내외 마스크 의무착용 행정명령을 내렸다. (2020.8.24. 연합뉴스)

 

배운 사람은, 꽁초를 길가에 버리고 침을 뱉는다

 

볼썽사납기는 해도 차라리 대놓고 길가에 꽁초를 버리면 치우기가 쉽다. 그러니까 길가에 버리는 자들은 조금은 배운(?) 이들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격이 있다. ‘그냥’ 버리는 게 아니다. 작은 불씨의 위험성을 잘 알기에 발바닥으로 들입다 비벼주는 자가 교양인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으로 침까지 뱉으면 확실히 실화를 예방할 수 있다. 배려심이 남다른 자들이다. 서울시청 앞 사람들은 역시 격이 다르다. 배운 사람들이다.

오나가나 배운 사람이 참 많은 서울이다. 선유도역 근처도 마찬가지다. 급기야 식당 주인은 꽁초보다도 100년에 한 번 나올 법하다는 보건 위기, 바이러스를 겁내고 있다. 꽁초를 버리되 침을 뱉지 말라고 애원한다. 꽁초로 애먼 나무를 지지고 함부로 침을 뱉는 일련의 벨짓거리는 코로나에 대비하는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훼손하기에 충분하다.

 

서울의 가로수는 살아남기 위해 독기를 내뿜는다

 

활성산소는 유해산소다. 우리 몸의 노화를 촉진한다. 사람들은 체내의 활성산소를 줄이기 위해 사활을 걸다시피 한다.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은행나무 가운데 항산화 효소를 가장 많이 함유한 나무가 종로의 가로수이다. 양재동의 은행나무의 엽록소 함량, 광합성 능력이 종로의 은행나무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한국농림기상학회, 2004년) 즉, 대기오염이 심한 지역의 나무일수록 항산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효소의 활성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도로는 아니지만 여전히 엄청나게 큰 재떨이를 애용하는 자들이 있다. 담벼락 밑이나 화단, 아니면 나무 밑둥구리에 마구 버린다. 길거리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한길가에 버리는 자들보다 한참 격이 떨어진다. 꽁초를 치우는 이들을 배려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다 보니 나무들도 역겨운 담뱃물을 24시간 마시고 산다. 그래서 서울의 가로수는 제빛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담뱃내가 짙게 배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울은 교통 밀집 지역이다. 게다가 이상 기후와 폭염, 가뭄, 자외선, 미세먼지 등의 환경 오염 속에서 자라고 있다. 서울의 감·사과·버찌·살구가 외면당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서울시에서 가로수 열매가 환경 호르몬의 적정치를 밑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곧이듣는 이들은 거의 없다. 허약한 나무는 아예 서울의 가로수로 뽑히지 못한다.

나무라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서울의 가로수가 내뿜는 피톤치드에는 훨씬 더 강력한 식물성 살생 물질이 들어 있다. 그래서 삼림욕을 즐기려던 각종 물 것, 날것 할 것 없이 저마다 식솔을 거느리고 들로 산으로 이사를 한다. 한 마디로 서울의 가로수는 서울 사람을 닮았다. 강인하다.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아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약을 치지 않아도 절로 독기를 내뿜고 살아가는 점이다.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도로변이 깔끔한 곳도 있다. 꽁초가 없나 했더니 아니다. 곳곳에 숨어 있다. 얄궂다. 화초 틈에 끼우고 나뭇가지에 쑤셔박고 수챗구멍 속으로 집어던진다. 앉아서 피우고 서서 피우고 누워서 피우고 걸어가면서 피운다. 사람이 앉은 곳, 서 있는 곳, 걸어 다니는 곳, 누워 있는 곳에 꽁초가 있다. 운전하면서도 피운다. 자동차가 정차한 곳, 주차한 곳, 차도 곳곳에 꽁초가 보인다. 재떨이는 필요하지 않다. 온 천지가 재떨이다. 한길이든 고샅길이든 가리지 않는다. 꽁초를 버리는 짓은 양심을 버리는 짓이다. 염치를 모르는 자들의 비행이요 탈선이다.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범죄 행위다. 공공의 적이다. 집게로 줍고 빗자루로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를 방기하는 짓 또한 아주 졸렬한 짓거리다. 직무 유기다.

▲ ◯◯대학교 간호보건대학 등나무 앞(금연구역지킴이, 2020. 05.07.)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던 꽁초

 

할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담배를 태우셨다. 백동연죽의 대꼬바리에 봉초를 집어넣고 불을 붙이셨다. 불이 잘 붙지 않으셨던지 한꺼번에 서너 모금씩 빠는 바람에 방안은 금세 매캐한 연기로 자욱했다. 그렇지 않아도 건뜻하면 방고래가 막혀 연기가 역류하는 바람에 아침부터 온 집안이 연기투성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봉창 앞에서 뻐끔뻐끔 피우셨다. 이윽고 재떨이에 떨고 담뱃진을 빼내신다. 이때는 이삭을 훑어낸 벼줄기가 제격이다. 먼저 대꼬바리를 분리한다. 재떨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요란하다. 재떨이는 삼학소주 회사에서 배부한 기념품이다. 놋쇠로 만든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대꼬바리에 벼 줄기를 쑤셔 넣고 대나무 설대 쪽에서 빼내신다. 그때마다 이삭머리에는 시커먼 진이 잔뜩 묻어난다. 끈적끈적한 진이 묻은 벼줄기를 손으로 뽑아내셨다. 할아버지 손가락은 물론 손톱 밑, 치아, 목구멍, 콧구멍 모두 담뱃진 범벅이었다. 말씀하실 때마다 누런 이가 드러나고 담뱃내가 진동했다. 재떨이를 비우는 건 내 몫이요, 할머니는 수세미나 볏짚에 잿물을 적셔서 힘들게 닦으셨다. 댓돌 밑에 엎어 놓으셨는데 번들번들 윤이 났다. 또 다른 할머니의 일과였다.

 

60년 전 일이다. 당시엔 미세먼지나 오존 지수는 물론 금연이란 말을 알지 못했다. 마스크도 없었고 코로나도 몰랐다. 한번은 졸업을 앞두고 중학교 입시 문제로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하셨다. 그날 할머니 심부름으로 ‘아리랑’ 두 갑을 사다 드렸다. 면사무소가 있는 서리등까지 30분 넘게 뛰어가야 했다. 아주 쑥스럽게 미안해하시던 선생님 – 이마가 벗겨진 모양에 따라 우리는 3자(字)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마이크가 없어서 운동장 조회 때 육성으로 구령을 붙이셨다. 그때마다 뒤꿈치를 세우시던 모습이 선하다 – 을 기억한다. 모르긴 해도 당시에 그런 궐련을 피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있어도 누가 그렇게 긴 꽁초를 버릴까?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신작로나 장바닥 어디에서도 꽁초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봉초라고 해서 아무 때나 사는 것도 아니었다. 보급날이 정해져 있었다. 어느 특정한 날, 이른 아침 점방 앞에서 줄을 서야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정해진 시간도 없었다. 주인이 열고 싶은 때 문을 열었다. 내게 주어진 것은 달랑 ‘풍년초’ 한 봉뿐이었다. 누군가는 줄을 안 서도 살 수 있고, 누군가는 뒷돈을 주고 몇 봉을 더 샀다는 말들이 들렸다. 당시 봉초는 나라에서 돈없는 사람들을 위해 손해를 보고 판다고 했다. 돈을 내고도 사정을 하면서 겨우 한 봉씩 배급을 받은 것이다.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GNI)이 1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 얘기다.

▲ 왼쪽은 1955년부터 발매되어 1960년에 중지한 퐁년초, 우측은 1961년부터 발매를 시작 1973년에 판매를 중지한다.(‘복분자의 블러그’에서 인용함)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9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우분투(Ubuntu) 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공동체 정신, 인류애를 일컫는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 '당신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우리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다. 풍년초는 사라졌다. 봉초를 말아 피우는 사람은 없다. 잘 사는 나라가 됐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이다. 문제는 나만 즐기면 그만이라는 사람들 때문에 서울은 꽁초 천지로 변했다.

▲ 서울환경연합이 2019년 12월 23일 서울 강남 KT&G 본사 사옥 앞에 전시한 직경 3m, 높이 5m에 이르는 대형 담배꽁초 트리. 124명의 자원봉사자가 한 달 동안 수거한 7만여 개의 꽁초, 50kg를 활용해서 제작했다.(서울환경운동연합)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 8촌(寸)쯤 된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肝)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1616년(광해 8년)부터 바다를 건너온 바 1621년(광해 13년) 이래로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인조 16년, 1638년 8월 4일의 기록이다. 이토록 요초를 입에 물고 대낮 큰 길가에서 홑옷 바람으로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가 생기고, 숙종 3년에 무인 서치가 담배 1태(馱 : 마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 바리)를 이조 판서 민점의 사위에게 뇌물로 주고 감찰에 제수될 수 있었는가 하면, 유배를 가던 김홍륙이 임금(고종)에게 올리는 차에 넣어 주면 은전(銀錢) 1,000원(元)을 주겠다고 모반을 꾀하기도 한다. 담배로 인해 불이 자주 나서 이를 엄금하고, 급기야 정조 22년(1798년)에는 “벼는 높고 건조한 땅에 심고 기장은 평평하고 비옥한 땅에 뿌리는가 하면 기름진 땅은 모두 다 담배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고”라며 경작을 금지한다. 그러나 임금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속칭 이른바 남초(南草)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혹은 위(胃)를 조양(調養)하는 데 이롭다고 하고 혹은 담(痰)을 치료하는 데 긴요하다고 하나,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속습(俗習)이 이미 고질이 되어 남녀노소를 논할 것 없이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횡죽(橫竹)으로 피우고 있는데, 세상에서 더러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고 하니, 비록 금하고자 하나 이유가 없을 따름이다.” (순조 8년, 1808년 11월 19일)

이렇듯이 담배는 젖먹이를 제외하고 만백성이 선호하는 기호품으로, 때로는 독살의 수단으로의 활용하고 때로는 치료제로 둔갑하는 요초(妖草)였다. 나는 여기에서 ‘요초’를 ‘요사스럽고 망령된 풀’이란 뜻으로 시용했는데 아뿔싸! 사전적 의미는 ‘기이하고 아리따운 풀’이다. 요망하고 간사함이 요염함과 아리따움으로 등치되니 담배는 참으로 요망한 마귀, 요괴(妖怪)가 아닐까?

▲ 속없는 이 사람들(반가의 자제들), 말을 탄 기생에게 시중을 드느라고 담배 붙여 대령하며, 구종(驅從 : 말을 모는 시종)되기 자원하며 갓 벗어 마부 주고 마부 벙거지를 제가 쓰고서 검은 띠 허벅대님 매고 말고삐를 잡고 있다. 난처한 것은 구종이다. 차마 상전의 갓을 대신 쓰지는 못하고서 고삐 대신 갓 잡고 헛채찍 맨상투에 심통이 가뜩 나서 비슥비슥 뒤만 따라간다.(신윤복의 연소답청, 네이버)

 

간접흡연의 진원지가 된 흡연 부스

 

금연구역을 지정·관리하는 이유는 간접흡연의 폐해를 최소화하는 데 있다. 현재의 흡연실이나 흡연 구역은 어떠한가.

용평 리조트 그린피아 콘도 앞 야외 흡연 구역이다. 떡볶이집과 아주 널찍한 바비큐 집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콘도 고객을 위한 시설은 아니다. 아주 넓다. 쾌적해 보인다. 그런데 이용한 흔적이 없다. 드나드는 길이 안 보일 정도로 입구부터 풀이 무성하다. 코로나 때문에 그동안 손님이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평일이지만 엊저녁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야외 테이블까지 붐볐다. 가게 앞에 쓰레기통이 보이고 꽁초와 각종 오물이 수북이 쌓여 있다. 굳이 흡연 구역까지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리라. 사람들이 찾지 않는 전시용이다.

고양시 성석동, 고즈넉한 파이 가게. 본관과 야외 테라스, 그리고 애완견도 드나드는 별관이 따로 있다. 전망 좋은 숲속의 카페로 실내외 모두 금연구역이다. 차 한잔하고 나서다가 문득 흡연실의 존재가 궁금했다. 운동장 같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흡연 구역이 풀숲에 동그마니 서 있었다. 다가갔다. 멀어서 그랬을까? 역시 이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하! 어쩌면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한 것이 아닐까? 어지간한 중독자가 아니라면 이 폭염에 그곳까지 가려고 할까 싶다. 괜찮은 발상이다. 며칠 뒤에 갔더니 바비 태풍 때 천막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다면 서울 도심에 설치한 흡연 부스는 어떤가? 옆과 뒤 벽면이 뚫려 있는 '개방형'이거나 일부 방향만 개방한 '부분폐쇄형'이 대부분이다. 모두 막혀 있는 '폐쇄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 다분히 흡연자 편의로 설치한 구조물이다. 흡연실 안의 재떨이를 보니 해도 해도 너무했다. 구역질이 날 정도다. 생각이 있어서 들어간 흡연자도 마찬가지로 역겨워하지 않을까. 흡연자 대부분이 흡연 부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아무데나 꽁초를 버린다. 멋모르고 지나치다가 된통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편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은 지난 8월 27일 온라인 브리핑에서 “흡연자 자체가 코로나 19 고위험군 중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담배 연기 자체라기보다 흡연 과정에서의 '호기'(呼氣), 즉 내뿜는 숨에서 충분히 바이러스가 노출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흡연 구역이나 부스는 간접흡연의 폐해를 전혀 줄여 주지 못한다. 간접흡연자를 배려하기는커녕 흡연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방대본에서는 간접흡연 자체가 코로나 19 감염에 있어 위험 행위라고 말했지만, 실제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담배 연기 뿜는 곳에 간접흡연의 위험은 상존한다. 금연구역 안에까지 흡연실을 세워 놓고, 아무데나 개방형 흡연 부스를 설치하는가 하면, 금연구역 내 흡연 행위로 적발이 돼도 금연 교육 및 금연 지원 서비스를 받으면 과태료를 감액·면제받을 수 있도록 한 보건복지부는 도대체 어쩌겠다는 건가? 하면 하고 말면 마는 식이다. 금연구역을 지정·관리하는 이유는 간접흡연의 폐해를 최소화하는 데 있음을 거듭 상기하기 바란다.

▲ 좌측부터 서울 광진구 동서울터미널 앞에 설치된 흡연 부스 타이소(TAISO·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뜻)(뉴스1, 2016.11.08.), 을지로입구역 부근 흡연 부스 주변(THE FACT, 2015.8.30.), 서울의 전철역 근처 흡연 부스 안 재떨이(네이버카페, 서울 권석 제공)

 

서울의 공기는 촉감이 다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끈적거린다.
서울의 공기는 친화력이 좋다. 갓난아기와 골초를 구별하지 않는다.
서울의 공기는 거칠 것이 없다. 금연지역이든 흡연 부스든 멋대로 들락거린다.
서울의 공기는 눈에 보인다. 희부옇다가 실낱같은 한 줄기 퍼런색이 피어오르다 이내 하늘로 올라가 거무튀튀하게 드리워지다가 밤이 되면 더 진한 먹빛이 된다. 서울의 공기는 밤에도 보인다.
서울의 공기는 냄새가 다르다. 예전부터 노린내, 비린내, 향내, 타는 내, 썩는 내를 오취(五臭)라고 했다. 서울의 냄새는 한 가지를 추가한다. 이름하여 짐승내(獸臭:수취)다. 이는 곧 칠규로 악취를 내뿜고 이목구비마다 독취(毒臭)가 나며 오장육부 모두 특유의 구린내(屎臭:시취)를 풍긴다. 이들을 예서 모두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허파에 쉬쓴 주제에 내 탓 네 탓 수염 탓하기 바쁜 구취(口臭), 100마지기 채우려고 한 마지기를 강탈하는 탐취(貪臭), 돈을 보면 시구문(屍口門) 나가다가도 뒤돌아보는 전취(錢臭), 피에 굶주려 부모·자식·부부의 연까지 끊어버리는 혈취(血臭), 그리고 오입쟁이 제 욕심 채우듯 이놈 저놈 찔벅거리다가 고양이가 알 낳을 노릇이지, 세금 안 붙는다고 눈만 뜨면 예수 팔고 부처 팔아 치부한 돈, 세습하는 자들 부추겨서 어떻게 한 표라도 구걸해 보려고 예배당 법당 문지방 닳도록 쫓아다니는 모리배들이, 시궁창 골짝 할 것 없이 오만데 휘저으며 추깃물을 질질 싸고 다니니, 서울은 악취 구덩이, 취갱(臭坑)이 되고 말았다.

이를 맑게 해 주는 것이 비요 바람이요 촛불이요 나무다. 우리는 비와 바람을 어쩌지 못한다. 자연의 섭리에 맡긴다. 촛불도 사람 따라 달리 춤을 춘다. 믿을 게 못된다. 하지만 나무는 가꾸기 나름이다. 나무 혼자 힘으로는 버겁다. 풀들도 한몫한다. 풀과 나무는 더러운 공기를 정화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이를 가꾸는 사람은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생명의 파수꾼이다. 물은 근원이 없어지면 끊어지고 나무는 뿌리가 없어지면 죽는다. 한강을 시궁으로 만들고 이 땅을 재떨이 취급하지 마라.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배려하는 세상이다.

(계속)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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